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정호승 시인은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며 시를 썼고
안치환이 그걸 노래로 만들어 술자리마다 흉금을 풀어놓았는데
나는 그만한 시도 못 쓰고 그만큼 노랠 부를 재간도 못 가졌는지라
해마다 독려장이 날아오는 홈페이지 운영비를
정중하게 부치며
스스로 나 자신에게 사주는 술값이려니 생각하기로 했다.
1년 운영비래야
친구와 마주 앉아 마시는 두어 번의 술값에 불과하니
나의 지존이며 영원한 주인이신
'나'라는 어르신에게 기껏 두어 번 술 사주는 일로
웬 생색이 이리도 심할까 싶기도 하다.
사실 내 홈페이지는 나만 들락거린다.
나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딩가딩가 춤추며 혼자 뒹굴며 노는
나만의 놀이터인 셈이다.
한참 젊을 때의 불의 사고로 직장 직업 떠나고, 돈 떠나고, 친구마저 다 떠나
혼자 놀기에 익숙해진 나여서 오히려 편한 곳이기도 하다.
그곳으로 올해도 어김없이
"몇 일 후면 귀하의 사글셋방 계약기간이 만료됩니다. 만료일이 지나면
모든 짐들이 폐기물 딱지를 달고 어딘가로 실려가고
강물에 뿌려지는 유골가루처럼 귀하의 추억도 함께 유실되니
반드시 연장 재 계약을 서두르시기 바랍니다!"라는 독촉장이 날아들었다.
한마디로 "빨리 내게 술 사주지 않으면 너완 끝장이야!"이다.
나는 고민한다.
지난 한해 그에게 섭섭했던 일, 귀찮거나 곤혹스럽게 여겼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결국 결제의 잔에 술을 따르게 되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다시는 그러지 마라!"는 속내를 내뱉어야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고
아예 꼼짝 못할 서약서라도 받아둘까 하는 독한 마음까지 하게 된다.
세상 어떤 계약이든
일단 도장을 찍고 나면 갑에서 을로 둔갑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에
술잔을 채우는 손끝이 별수 없이 떨리는 것이다.
잔이 채워져 결제가 끝나면 공손해질 수밖에 없는 거다.
잔에 든 술의 향이나 맛은 이미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이 시점부터 시작될 관계는
갑과 을, 주인과 종의 수직적 상하관계일 뿐 결코 수평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그가 난데없이 거만해지고 똥고집 불통의 횡포에도 그를 달래어보는 밖에
다른 요량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 순간부터
키보드 하나하나에 오체투지하는 심정으로 겸손하고,
버튼 하나하나에 경배의 절을 아끼지 말아야
온전하리, 올 한해!
고단한 육신을 예까지 끌고 와주신 나의 지존이시여
경배의 잔을 높이 들라!
그리고 이 몸, 제발 긍휼히 굽어살펴 주시라요! 는 청을
향불 위에 제삿잔 돌리듯 빌고 빌어 올리는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