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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형씨, 불 좀 빌릴까요?

by 정소슬 posted Apr 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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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씨, 불 좀 빌릴까요?
--- 불혹(不惑) 초입에 만난 '어린 조폭' 이야기입니다.

 


잘 나가던 30대 말,
과로로 쓰러져 3년여를 병원을 오가다 보니 직장도 떨어지고 그간 벌어둔 돈 다 까먹고 달랑 아파트 하나 남았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3년 동안 몸이 많이 호전되었다는 거였죠.
아직 어리기만 한 애 둘을 데린우린 목구멍 풀칠을 위해 뭐라도 해야했습니다.


이것저것 궁리하다 아파트를 팔아 치킨집(다른 재주가 없었으니...)을 시작하였습니다.
마누라가 사장, 나는 종업원으로 마누라가 구우면 나는 배달하는 전형적 부부 치킨집이었는데
그래도 한때는 중소기업 중역까지 지낸 귀하신(?) 몸이다보니 자존심만 달랑 달랑 남아 치킨 봉투 하나 들고 남의 대문 서성대는 일이 왜 그리도 쪽스럽던지.
문이 열리고 그 집 어른들은 저 안 소파에 앉아 있고, 너댓 살쯤의 꼬마들에게 내 자존심을 배달해야 하는......


마침 막 시작된 IMF로 경기는 맨 밑바닥이었고, 꼬맹이들이 건네주는 배춧닢 몇으로 목구멍 거미줄을 걷는 내 절박함이 왜 그리도 밉던지
주문이 밀리는 날엔 그저 짜증스러웠고, 돈 못 벌어도 한산한 날이 좋기만 한... 한심한 게으름에 길들여지고 있었습니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죠.
나를 쓰러뜨린 병명은 성인 사망률 1위라는 치명적인 뇌졸중이었고, 그때까지도 '절대 안정'에다 '과로나 급격한 스트레스는 곧 재발!'이라는 주치의의 경고장이 차압스티커처럼 몸에 따라붙어 있었기 때문이죠. 어쩌다 가게에서 손님과 언쟁이라도 벌어지면 방패막이로 나선 아내에게 떼밀려 밖으로 밀려나 있었고, 점점 악바리로 변해 가는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내의 과보호가 시작되어 의욕이라곤 손톱 밑 때 만큼도 남아 있지 않는, 그저 하루하루 늙어가는 그 일 뿐이었습니다.
흔히 불혹이라는 나의 사십대는 그렇게 회색 빛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가게에 낯선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친구의 모친이 별세했다는 부고였습니다.


"애고, 배달도 뜸한데 문상이라도 가야겠다! ......?"


그 한마디에 아내는 당장 그러라고 했습니다.
짜증만 내는 나를 부려먹기보다 혼자 북 치고 장고 치는 게 훨씬 편하다고 여겼을 겁니다.
집을 나서는 내 마음은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오랜만의 해방감, 그간 못 만났던 소꿉친구들도 두루 만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초상집의 풍경이란 게 늘 같잖습니까. 

향불 앞에 부의금을 내밀고 곡 서너 가락 뽑은 뒤 꾸벅 절 두 번하고 몸 틀어 상주들과 절 한 번 꾸벅...
돌아 나와 앉으면 주안상이 도착하고, 그 옆에는 먼저 온 손님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동양화를 두들기고 있지요.


"어이 친구, 자네 왔구먼. 배보다 주머니를 먼저 채워야지. 이리와 앉게!"


나이 마흔이 넘어가자 이런 자리 점점 잦아졌습니다.
그 중엔 친구의 영정 앞에 머리 조아려야 할 때도 더러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인생무상 따위의 감상에 젖는다는 건 헛말이죠.
"Go men go, Is men is"란 말만 통합니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 눈 벌개질 때까지 그날 밤의 손바닥 운세를 들여다 볼 뿐입니다.
나도 잘 나갈 때는 그런 자리에서 주머니깨나 불린 사람인데, 요즘은 영 아닙니다.
내 운이 이미 소진된 상태란 걸 겁니다.


그런데 그날 밤은 괜찮았습니다.
그 바닥에서의 우리의 룰에는 '무전사절'(현금 없으면 끼워주지 않음), '낙장불입'(한번 떨어뜨린 패는 거둘 수 없음)에 이어 '갱편불납'(딴 돈은 절대로 돌려주지 않음)이죠.
그날 운이 괜찮았다 했으니 돌아 올 때 내 호주머니 제법 두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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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두어 시간 경,
달도 휘영청 밝았습니다.
팔월 대보름만큼 밝았습니다.


"푸풋... 내 운 아직 끝난 건 아니야. 나 아직 살아 있어!"


나는 차를 골목 입구에다 대고 두툼한 호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경쾌한 걸음으로 성큼성큼 내딛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 앞에서 장정 셋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암내 쫓는 숫고양이들만 담장 위를 뛰어다닐 시간이라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골목이었습니다.


내 걸음이 갑자기 잘아졌습니다.
직감으로 그냥 지나쳐갈 위인들이 아니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멀리서 보아도 덩치가 보통들이 아니었습니다.
흔히 얘기하는 조폭 무리 같았습니다.


나는 우선 호주머니에 찔렀던 손을 빼내고 호주머니를 다독였습니다.
실제론 별로 불룩해 보이지도 않았을 거지만 나는 괜히 마음이 쓰였습니다.
칼이라도 들이밀면 그깟 지폐 몇 내주고 가면 그만일 일인데......


그 정도로 그칠 그들이 아닐 거라는 불안감이 온 몸을 휩쌌습니다.
그들과 나와의 거리 30여 미터가, 코앞까지 좁혀지는 데에 수 십분이 흐른 거 같았습니다.
그 짧은 순간 머리 속은 펜티엄4급으로 돌고 있었습니다.


골목을 잘못 접어든 듯이 뒤돌아 가버릴까?
아니면 모른 채 걸어가다가 갑자기 뛰어버릴까?
그들과 맞짱 뜬다는 것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었고, 그들이 칼이라도 끄집어내면 "강도야!"하고 소리를 질러야하나 말아야 하나, 별의별 게 다 걱정이었습니다.


머리 속이 과부하로 금세라도 멎어버릴 정도였을 때 불과 3미터 앞까지 좁혀져 있었습니다.
그때 한 놈이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내고 있었습니다.
내 등줄기에 섬광 같은 찌릿한 전율이 타고 내려와 종아리를 쑤시기 시작했습니다.


아, 올 게 왔구나!
친구 어머니 문상 다녀오던 날이 내 제삿날이 되는구나!!

내 집과의 거리 불과 20여 미터,
소리를 지르면 한 등빨하는 주인집 아저씨가 달려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는 입도 문을 닫아거는 법입니다.


호주머니에서 손을 꺼낸 그 놈,
그 손을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입에 물린 게 담배라는 사실을 안 건 코앞으로 바짝 다가선 그의 눈동자를 본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장정으로 본 그들은 고등학생쯤 되어 보였습니다.
아마도 유도부나 씨름반 정도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휴......!!"


나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다행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만...


"형씨, 불 좀 빌릴까요?"


방금의 두려움이 다 걷히기도 전에 압박해오는 모멸...!!!


그만한 나이의 자식을 둔 나로선 정말 참기 힘든 모멸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엄습하는 두려움...
그만한 애들은 물불 안 가리는 나이라는 사실을 내가 모를 리 있겠습니까?
내가 머뭇대자 다시 물었습니다.


"불 있소, 없소?"
"...................!! .................??"


잠시 식었던 머리가 열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 놈들을 훈계해야 하나? 타일러야 하나? 아니면 조용히 비켜갈까?
옆에 놈이 불쑥 내뱉었습니다.


"아자씨! 꼽다는 얘기요?"


톤 두꺼운 음성이 내 머리 위에서 쏟아졌습니다. 그놈 키가 보통이 아니어서...
정수리쯤에 벌에 쏘인 듯 찌릿한 통증이 발바닥까지 번져 내려오고 있었고, 써늘해진 등에서 식은땀이 주루룩 흐르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대답을 지체했다간 봉변을 당할 게 뻔했습니다.


"나 담배 안.. 피..요!"
"진즉 말할 일이지... 퇫!!"


그놈들... 내 옆에다 침을 내뱉고는 어슬렁어슬렁 멀어져 갔습니다.
순식간에 두려움과 모멸감을 한꺼번에 당한 내 다리는 집 대문도 못 넘어설 정도였습니다.
집으로 들어가 현관문을 여는 순간 그때까지도 자지 않고 있던 마누라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당신 몸이.. 어디 안 좋나요??"


나는 제법 긴 시간동안 말문이 안 열려 말도 못하고 소파에 털썩 쓰러졌습니다.


"당신 왜 그래요??"


아내는 부리나케 방에서 침(혈침)부터 들고 나왔습니다.
내 손가락 끝이 따끔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 겁니다.
내 혈색은 하얗게 변하여 있었을 것이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볼을 타내리고 있었을 테니까요.


겨우 말문이 터였을 때...


"괜찮아. 내가 억울해서 그래! 예의라곤 콧구멍 먼지만큼도 없는 놈을 봐서 그래! 동방예의지국인 이 나라가 썩어 가는 꼴을 봐서 그래...!!"


그제야 다소 안심하는 표정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했는데 그래요?"
"우리 큰애 나이 뻘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 내게 담뱃불을 달래, 흐! 그것도 내 어깨를 짚을 듯이 '형씨!' 하면서 말야...!!"
"어디서?"
"바로 집 앞에서..."
"그래서요?"


대답을 하려니 솔직히 쪽이 팔렸습니다.
내가 대답을 머뭇대자...


"그래서 싸웠어요?"
"싸우긴... 한 마디 해 주려다 참았지!"
"잘 했어요."
"잘하긴? 대낮 같았으면 그놈들 멱을 따버렸을 거야!"


내가 해 보일 최대한의 오기를 부려본 꼴일 겁니다.
솔직히 낮이더라도 자신 없습니다. 아마도 갈수록 더할 겁니다. 불쌍한... 가련한......


"뭐요? 싸우겠다고요? 당신, 끝내 날 과부로 만들고 싶다면 그러세요! 당신은 그들과 핏대 올렸다간 그들 손에 당하기 전에 스스로 쓰러져요. 당신 그 빌어먹을 성질 좀 제발 죽이세요! 조마조마해서 못 살겠어요......"


정말 슬픈 밤이었습니다.
그 후 며칠 동안을 치를 떨어야 했습니다.
지방 신문에 우리 동네 일대를 휘젓던 미성년 조폭 일당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들은 모두 고등학교 중퇴생들이었다 합니다.


불혹(不惑)은 어쩜 어린 망나니를 보아도 설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지도 모릅니다.
흐흐... 다시 생각에도 떨떠름합니다.


(2002. 3. 7)

 

Who's 정소슬

profile

브랜드 : 정소슬
메이커 : 1957년식 울산 産
성능/직업 : 비정규직
취미 : 긁적이기, 똥폼으로 사진 찍기
잡기 : 음치, 몸치, 길치... 등 중증 치과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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