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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문학청년 문병란을 회고하다 / <민족작가연합> 민족작가 3호

by 정소슬 posted Jan 01, 2022

문학청년 문병란을 회고하다

- 문병란(文炳蘭. 1935.3.28生~2015.9.25卒, 호 서은[瑞隱])

 

 

 

저항시인 혹은 민족시인, 통일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문병란 선생님과 인연을 가지게 된 것은 2014년 말 경이었다.

그 해 필자의 졸시집 『사타구니가 가렵다』(푸른고래, 2014)가 출간되어 문우들과 문단 선배 분들께 두루 부치게 되었는데 그 답으로 문자 혹은 이메일을 보내오신 분, 손수 쓴 붓 글을 보내오신 분, 엽서 혹은 편지를 보내오신 분, 다양하였다.

그 중 제게 가장 깊은 감격의 인연을 주신 분이 문병란 선생님이었다.

무명에 불과한 제 문학사에 있어 최대 사건이었고, 제 시의 방향성 선회 및 변혁을 이끈 착화점이기도 하였다.

아래는 당시의 감동을 제 홈페이지에 기록하였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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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이상 '詩'라는 걸 써오면서 이리 감격적인 일이 처음이라

이를 적어 봅니다.

8여 년 전, '정소슬'이란 이름으로 이미 시집을 낸 바 있지만 자신감 부족이랄까, 돼먹잖은 치기(稚氣)랄까, 딱 한 권만 출판한 탓에 이번이 사실 첫 시집이나 다름이 없어 그간 사귄 문우들과 문단 선배 어른들에게 두루 부치게 되었습니다. 

늦게 입문한 까마득한 후배로써 그것이 당연한 도리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시집을 받았다는 문자 혹은 이메일, 직접 전화를 해오신 분도 계시고…….

 

그런데 평소 제가 존경하고 흠모해온 대 선배님이자 어른 중 어른이신 팔순의 문병란 선생님께서 직접 편지를 보내오신 겁니다.

너무 황송하고 가슴이 떨려 차마 뜯지를 못하고 조심조심 돌려보다 겨우 뜯었는데 안에는 선생님께서 손수 꾹꾹 눌러쓰신 손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가슴이 울컥거리든지... 

가슴이 겨우 진정된 이 밤, 그 내용을 한 자 한 자 옮겨 적어봅니다.

 

 

 

<<문병란 선생님의 손편지(제1신)>>

 

<첫장>

정소슬 시인께.

 

심상치 않은 시집 『사타구니가 가렵다』를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방이 막혀버린 죽음의 공간 같은 이 숨막힌 현실 속에서, 정말로 우리의 가려움증을 얼마쯤 해결해 줄 것 같은, 너무도 소중한 시적 화두가 번뜩거리고 있습니다.

가려움증이 견딜 수 없는 오늘의 현실, 그 무엇이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지, 급소 공략 극약 처방으로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흥취나 관조의 시에서 응급처치 급소 공략, 그 위기 탈출의 한반도 살길 그것을 찾아, 문제 제기를 해준, 놀라운 氣相(기상), 諷刺(풍자)의 칼날이 번쩍이기에 민족적 숨막힌 이 땅에서 위기 탈출의 어떤 통로를 암시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벙거지> 「봉두난발에 꽃 치장한/ 엉거주춤에 테 메운/ 내 모습/ 때로 멋있어 보일지는 몰라도// 자꾸만 감출 곳이 늘어나는/ 이 거지 같은/ 곤혹을/ 그대는 아는가」(벙거지 전문)

 

우선 자기 풍자가 무서운 고발을 담고 있어 그 날선 풍자의 메스를 장차 세상으로 향할 그런 준비 작업이 철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증답서 보내고 차근차근 다 감상한 다음 우정의 글(評) 다시 보내겠습니다.

 

상선 앞세우고 들어온 군함들이 100여 년 간 이 땅을 능욕하며 온갖 죄악을 저질러온 탓에 장사꾼, 훼방꾼, 전쟁꾼, 협작꾼 틈아귀(틈바귀)에서 모든 게 거덜나고 파탄나고 타락하고 성한 게 없습니다. 어찌 詩가 온전하겠습니까.

 

 

<다음 장>

*. 귀한 시집을 받았지만 기간의 시집들이 모두 절판되어 묵은 책에서 카피한 것 우정의 답서로 대신 합니다.

틈나시면 들여다보시고 시쓰는 데 서로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려붙여진 선생님의 시, '인연서설', '희망가'에 이어 선생님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직녀에게'도 함께 붙여져 있었음.)

 

MBR-01_1.jpg

 

MBR-01_2.jpg

 

MBR-01_3.jpg

*. 독특한 이 편지가 문병란 선생님만의 편지 포멧입니다.

 

 

고민입니다.

정말 고민입니다. 어떤 답을 드려야 할지......?

내일 날이 밝으면 전화부터 해드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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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제 홈페이지에 기록된 내용이고,

이 기록 말미의 표현대로 봉투에 적힌 번호로 몇 번 전화를 드렸으나 그때마다 "출타 중"을 전하시는 사모님 목소리만 듣다가 대여섯 번 만에야 겨우 성공하였는데, 팔순답지 않은 청청하신 목소리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격동 속 질곡의 세월을 정면으로 맞서 싸워오신 분의 기개와 결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이후 선생님과 저는 다음해 돌아가시기 전까지 총 63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황송하게도 선생님의 편지 37통에 제가 답한 편지는 고작 26통에 그칠 정도로 선생님의 뜨거운 열정에 제가 따라붙기 힘들 정도의 버거운 체험이었다는 솔직한 고백을 않을 수 없다. 어떤 날은 두세 통의 편지가 한꺼번에 배달되기도 하였으니 말이다.

 

그러던 편지가 조금씩 뜸해지다가 뚝 끊긴지 달포여 만에 듣게 된 부고는 청천벽력이었다.

그간 암 투병 중이셨다는 까맣게 몰랐던 사실 앞에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래는 2015년 9월 25일 홈페이지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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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 무슨 청천벽력입니까?

 

선생님과는 지난해 연말 제 시집을 상재하고 저희 문학계 대 선배이시자 작가회의 대 어른이신 선생님께 부쳐드린 것이 인연이 되어

편지 왕래가 시작되어 바로 앞 달 8월 중순까지 이어졌었는데

소식이 끊긴 그 한 달 사이 암을 앓으셨다니......

 

며칠 전 추석 인사 차 배 한 박스를 부쳤는데...... 그것 채 뜯어 보시지도 못하신 듯하여(장례위원회측 말씀이 일 주일여 혼수상태이셨다 하시니) 더욱 죄스럽고 황망하기 그지없습니다.

 

부디 그간 무겁게 짊어지고 오신 민족 화합과 통일로의 염원을 이제 내려놓으시고 평안히 영면하시기를 빕니다.

 

이제 나머지는 우리 후배들이 이어나가야겠지요.

 

선생님, 짧은 시간이었지만 존경하고 또 존경하였고, 선생님의 그 정신과 신념을 깊이깊이 사랑하였습니다.

 

편안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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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남긴 며칠 후 선생님의 '추도의 밤(전남대)'에 맞추어 광주로 향했다.

무려 6시간이 걸리는 먼길이었다.

따라 나서주는 아내가 있어 그나마 가까운 길이 되었다.

함께 올린, 그간의 벅차고 은혜로운 가르침에 대한 곡진한 배례(拜禮), 그 한 번으로 어찌 다 갚아질까?

 

사실 선생님께선 아버지 같은 분이셨다.

내겐 상당 기간 비어 있었던 아버지 자리가 채워지는 그 느낌이어서 잦은 서신 왕래로 익숙해진 뒤엔 어리광스런 편지를 쓰기도 했었다.

내 아버지는 젊은 나이의 내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다음해 훌쩍 떠나시고 말았다. 심근경색이었다.

당해 아버지 연세 예순 아홉, 내 나이 서른 아홉이었다.

여태 반신이 온전치 못했던 나는 여섯 살짜리 아들과 함께 아버지 상을 치러야 했었다.

 

선배이기에 앞서, 스승이기에 앞서, 아버지이셨던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제 곁을 떠나가셨다.

다음날부터 내 시의 방향은 급선회하였다.

아니, 우왕좌왕 부초처럼 떠돌던 시의 방향성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께선 첫 편지부터 마지막 편지에 이르기까지 줄곧 그 말씀으로 독려하시고 격려하시고 힘 실어 주셨지만 나는 선생님께서 떠나신 뒤에야 그 말씀의 깊이를 재대로 깨치게 된 것이다.

 

그 때부터 문학적 사회활동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선생님께도 몇 번 어리광처럼 고백한 바 있지만 저는 시에 대한 문학적 소질이 그다지 많은 거 같지 않다는, 그래서 어쩜 이 길이 탈출구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다음해 봇물처럼 터진 탄핵 촛불시위는 그런 내 몸에다 불을 붙였다.

활화산이 된 서울 광화문을 수시 오르락내리락한 덕에 많은 친구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나와 같은 생각, 나와 같은 지향점을 가진 동지들로서 무한한 응원부대이자 가슴에 뜨겁게 와 박힌 박수갈채들이었다.

우리의 당찬 표출이 함성으로 불러모아지고 행진으로 똘똘 뭉쳐져 결국 혁명을 이룩하게 되더라는 벅찬 체험을 촛불이 타오르는 내내 체감할 수 있었고, 촛불이 사위어진 뒤에도 그 깨우침은 지속되었다.

고질화된 사회악과 반민족 정서를 타파해낼 활화산으로의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발로는 '문학청년 문병란'과의 문학 교류·교감이 단연 그 계기였고, 제 문학성 채화를 이룬 촛대가 되었다.

아래는 선생님의 마지막 서신 제37신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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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란 선생님의 손편지 제37신>>

 

정소슬 시인께.

 

씀바귀 마른 잎에 지나가는 만추의 가을바람 <소슬하다>를 떠올리는 정소슬님의 이름을 적으니 이 찜통더위도 한결 가시는 기분입니다.

자상한 글월, 이 더위에 너무나 큰 우정입니다.

육필서한 좀처럼 안 하는 이 시대에 저처럼 시세에 뒤떨어진 옛날의 시인 덕분에 수고 끼쳐드려 거듭 사죄와 감사드립니다.

 

오염(汚染, pollution)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 자본주의 과잉생산 재벌독재에서 연유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 가스 사용량 최고의 나라 미국을 필두로 이른바 잘 먹고 잘 사는 나라의 과학과 물질만능주의 mannerism에서 온 것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들의 주머니를 채우고 그들의 자연이 법 배반한 쾌적한 삶(?)

삶을 위해 근면과 검소와 청빈은 이제 거지도 쳐다보지 않는 놀부 시대, 변학도 시대, 자린고비들의 경쟁시대 그 덕분에 4계절의 리듬도 깨지고 자연의 복수는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逆天者들의 과도한 경쟁, 상도의는 무너지고 사기와 짝퉁 무엇이나 된다는 것이 최고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슬프고 억울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L그룹의 경영권 둘러싼 형제 부자간의 이전투구를 보십시오.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나눠 갖는 미덕보다 독점욕에 눈이 멀어 아버지, 큰아들, 작은아들, 돈 앞에서 인간이기를 포기한 막된 황금만능주의 참으로 가관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도 노동구조조정안 운운하지 재벌에 대한 어떤 정화나 책임전가에 대한 배려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 현실, 법인세 올리면 가면 쓴 외국 기업들 보따리 쌀까봐 벌벌 떨며 담뱃값이나 올려 세금 걷고

노동구조 운운, 봉급 쪼개서 임시직 만들어 젊은이 헐값으로 입막음 그것이 노동개혁(?), 빚져 국가부도 상태 그리스가 결코 남의 일 아니건만 잘 사는 흉내내면서 미국 상전 받들어 비인간적 무기만 사들이면 민족이 살길이 생길 것인지......

더워지니 그런 생각 말자 좋은 쪽으로 마음 고쳐먹지만 그래도 5천년 우리 터전이니 애국심까지는 아닐지라도 스스로의 생존권을 위한 본능적 민족론 살리기, 민족 갱생의도를 강구해야할 것이기에.

 

젊은이가 그에 야합한 잡지 매스컴(방송) 정체불명의 변말(은어)을 문화어 운운 국어마저 그 황폐함이 심하니...

어디서 이 한숨이 그칠 것인지요.

소슬님이나 저나 한낱 보잘것없는 시인, 저는 더욱 황혼길 죽음을 앞둔 낡은 세대, '걱정'이 무슨 아호인지 걱정하다 지쳐가는 꼴 아닙니까.

그래도 일사병이나 더위 여름감기 조심하시고...

더위 이기는 좋은 시 구상 쉬시지 않길...!

 

2015. 8. 4.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盛夏에

서은 배상.

 

추신 : 우리 서민들 잘못도 크지만 지도자들의 맹성(猛省, 매우 깊이 반성함)이 요하며, 民族更生을 위해선 전 국민의 반성이 요구됩니다. 집단적 허구의식, GDP 북한의 몇 십배 운운하지만 그 행복도가 과연 몇 십배(?)인가 생각해야 합니다. 자업자득 스스로 함정을 파선 안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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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추컨대 선생님께선 이 편지를 부치신 후 갑자기 악화된 건강으로 급거 입원(암으로 판명)이 이뤄지지 않았겠나 싶다.

달포여 만에 청천벽력의 부고를 접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위 마지막 서신에 나타나는, 죽음을 달포여 앞두신 분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명료한 시대 판단력과 우리들이 해야할 바를 조목조목 일러주시는 선배 선각자로의 조언, 평생 해오신 교육자로써 끝까지 그 직분 소신을 견지하시는 모습 등은 우리가 본받아할 '문병란 정신'이라 여겨진다.

 

선생님의 편지를 모두 실어 보여드릴 수 없음(추후, 오고간 편지 63통 모두 묶은 책 출간을 예정하고 있음)은 안타까우나 첫 편지와 마지막 편지 두 통 만으로도 '문학청년 문병란 정신'과 그 가르침은 충분히 읽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우리가 본받을 민족시인에 대한 회고를 마무리한다.

 

더 소상히 서신 왕래 내용을 읽고 싶다면 저의 홈페이지(http://www.soseul.pe.kr/xe/nidana)에 접속하면 열람할 수가 있겠다.

 

 

광주의 망월 하늘에 굽어 절하며

2021년 11월 10일, 울산에서 정소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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