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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죽어서 산 자가 죽어 사는 자에게 (김경훈의 <그대는 분노로 오시라> 감상평)

by 정소슬 posted Jul 1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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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시 전문지 [사이펀 2017 여름호] 내가 읽은 변방의 시 한편


 

죽어서 산 자가 죽어 사는 자에게

정소슬(시인)

 


무릇 봄이다. 아니 성큼, 여름이다.
겨울이 언제였나 싶다. 개나리 흐드러지게 머리 풀고 철쭉이 피 한 움큼 뿌리고 간 사이, 빙설의 광장에 떼지어 앉아 촛불로 지새던 그 밤이 언제였나 벌써 잊기 시작했다. 국정을 농단하던 무리들 줄줄이 잡혀가고 정권이 탄핵되고 세월호도 인양되고, 나른함이 정수리를 내리누르는 초하(初夏),


불, 물, 절망, 불의, 시퍼런, 기만적인, 불화, 상극, 신열, 돌개바람, 해일, 눈물, 한숨, 오만, 아집, 서릿발, 분노, 맞불, 단칼 등 섬뜩한 시어들 일색인 이 시를 좋은 시라 소개해야 하다니? 내가 왜 이 시대의 시인이었나 자괴감마저 인다. (흐흐)

 

 

    그대는 분노로 오시라 / 김경훈
    - 故 양용찬 열사 추모제에 부쳐



    불로 가신 그대여
    다시 오실 때에는 물로 오시라
    절망으로 가신 그대여
    다시 오실 때에는 희망으로 오시라
    불의에 맞서 가신 그대여
    다시 오실 때에는 시퍼런 의로움으로 오시라
    행여 기념하러 오지 마시라
    이 기만적인 화해와 상생의 시대에
    그대는 불화와 상극의 진정으로 오시라
    신열로 들끓는 억센 돌개바람으로 오시라
    저당 잡힌 고운 바닷가 다시 지킬
    거대한 희망의 해일로 오시라
    하늘길 땅길 바닷길 이어지듯
    그대는 그렇게 구름길 바람길 열린 길로 오시라
    눈물로는 오지 마시라
    한숨으로도 오지 마시라
    반성하고 수고할 줄 모르는 우리들
    오만한 아집을 삭일 찬 서릿발로 오시라
    분노가 진실한 정의가 되게
    그대는 맞불의 분노로 오시라
    먼 길 돌아 다시 오시는 그대여
    다시 오실 때에는 참 생명 평화 평등의 단칼로 오시라


    - 한국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 열사시집 『그대는 분노로 오시라』(2017, 도서출판b)

 


열사로 칭해진 '양용찬'은 누구인가?
1966년 귤 농사를 짓는 제주도 남원읍 신례리 가난한 농가의 3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나 제주대 사학과 2학년을 마치고 군에 다녀온 뒤 복학을 거부하고 일당 일만 오천 원 타일공으로 일하면서 <서귀포나라사랑청년회> <농민사랑> 등에 가입하여 사회 개혁 활동에 전념하던 중, 1991년 11월 7일 '우루과이라운드(다자간 무역협정)'와 '제주도개발특별조치법'의 부당함"을 외치며 분신하게 되는데 닷새만에 사망하기에 이른다.
향년 26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왜 이런 젊은이가 죽어야 하는가? 그가 남긴 유서의 일부를 발췌해보면


    "그러나, 그러나 아버지
    고난의 세월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모진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다.
    해를 넘긴 UR(우루과이라운드)은
    당신의 손에서 괭이를 뺏기 위해
    칼날을 갈고 있습니다.
    당신의 구부러진 허리로 일구어낸 땅을
    두 발로 딛고 선 아들은
    이 땅의 농군으로 살기를 원하지만
    특조법(제주도개발특별조치법)은
    괭이대신 고데들기(시멘트를 바를 때 쓰는 도구, 제주방언)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다정한 모습으로
    삽과 괭이 드는 삶을 찾아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기나긴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그 힘을 모아
    마지막 몸부림을 쳐야만 합니다.
    목청 터지는 거부의 울부짖음을
    처절한 저항의 몸짓을
    이는 반역이 아닙니다.
    살아남기 위한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는 결코 세계적인 제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제주인에 의한 제주인을 위한
    제주다운 제주를 원할 뿐." (유서 '아버님 전상서' 중)


    "우리는
    당신이 자랑처럼 말씀하시는
    4. 3전사(戰史)속에서
    왜 농축산물이 개방되고
    왜 부지런하다는 말을 들으며
    평생을 살아온 당신에게 지금은
    빚더미와 빼앗기다 남은 조그마한
    밭뙈기뿐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개구리마냥 불룩 튀어나온
    배를 채우기 위해
    당신의 굽은 허리로 일구어낸
    자갈밭을 빼앗아간 저들
    당신의 호미로
    이 아들의 괭이로 쫓아내야만 합니다.
    어머님
    핵과 군홧발이 이 강토 이 산하를
    윤간하고 있습니다.
    수입개방은 우리의 목을 죄어오고
    종합개방은 우리를 거리로 내쫓고 있습니다.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우리의 목소리를 억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저기 저 한라산의 철쭉은
    우리의 시퍼런 한을 품고 피어나고 있습니다.
    어머님,
    당신의 아들이
    소위 엘리트가 되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그저 부지런한 농사꾼이기를 원하십시오.
    철쭉꽃 입에 물고 쓰러져간
    4.3 민주 통일의 꽃
    협죽도(협죽도과에 속한 상록 관목)이기를 기도하십시오." (유서 '어머님 전상서' 중)


위 김경훈의 조시(弔詩)와 양용찬의 유서가 무엇이 다른가?
당시 양용찬은 책벌레로 통할만큼 늘 옆구리에 책을 끼고 다녔다 한다. 하여 위 같은 잘 조리된 정선의 글을 썼지 않나 싶기도 한데, 우발적으로 쓴 유서라기보다 정교하게 다듬어 쓴 시문(詩文)이라고 감히 평한다.


양용찬의 유서는 죽어서 사는 자가 죽어 사는 자에게 남긴 훈(訓)이요,
김경훈의 조시는 죽어 사는 자가 죽어서 산 자에게 바친 훈(勳)이다.


4.3학살로 대변되는 제주의 수난사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천혜의 자연이라 일컫는 우리의 국보에다 거대 해군기지를 세워 美 핵잠수함이 수시 드나들고 있고, 개발이란 미명아래 무자비한 中 자본이 들어와 위 유서에서 말한 국토 '윤간'이 공공연 자행되고 있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이를 보면 소녀상을 日만이 아닌 美와 中 대사관 앞에도 세워야지 않겠는가? 더 크게 더 많이 더 높게 세워야할 일이 아니던가?


지성이라 자부하는 시인들이 블랙리스트니 종북좌빨이니 온갖 음해와 박해에도 꿈쩍하지 않고 시대의 카나리아로서의 저항과 고발을 멈추지 않는 열사시집 속 61 명의 시인들(아니, '블랙리스트' 속의 9,473명의 문화예술인들) 정말 장하지 않은가?
반면 독재자의 생일 잔치에 불려 다니며 시랍시고 음풍농월의 재롱을 부려대던 시인들은 역사 속에서 유폐되어야 한다. 문학사에서 영원히 제거되어야 할 암(癌)이다. 정치 경제에만 적폐가 있음이 아님을…….


김경훈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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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제주 출생. 1992년 《통일문학통일예술》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삼돌이네 집』『그날 우리는 하늘을 보았다』『한라산의 겨울』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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