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인 척의 시인
시 아닌 시를 시처럼 쓰는 나는
시인이 아니다 시인인 척이다
시라는 병상에 시인인 양 누운 환자이다
동병상련을 앓는 동지가 시집을 묶어 곱게 사인까지 하여 보내올 때면 눈물이 난다 말기 암환자가 거울 건너에 누운 자신의 몰골을 들여다보는 듯한
병도 오랫동안 동거 동숙하다보면 한 식구가 된 듯 묘한 안도감이 들듯이 자신을 부추겨온 환상들이 죽어 그 고름 짜내는 의식이 얄궂은 이 병이듯이
시인인 척의 환몽이 죽어 시집이란 옹관 속에 영구 유폐된 줄도 모르고 예수가 사흘만에 부활하여 이천 년 넘게 살고 있음을 떠올리며
침상마다 드리운 반나절 짜리 링거 줄에 정신줄을 통째 매달아 놓고는
극적 부활로의 망상이 똑 똑 떨어져
살 속으로 고여드는,
거울 건너에 누워 하염없이 눈 맞춰오는,
거역하기 힘든 환시 환각 환청을 쫓는 고역 노역의,
나름으로는 겁나 아리따운 행역으로의
시는 바라밀이다
시답잖은 낱말 가지고도
현란하게 요술부리는 시인을 보면
부럽다 나는 왜
그런 재주 갖지 못했나 원망도 된다
썼다 찢었다 수북히 쌓인 원고지의 비분 싸안아 들고
불당 공양 불로 보시하고 내려오는
길, 보았다 바위를 돌며
탑돌이 수행 중인
낙엽의
바람 일다 바람 일다
마하
반야
바라밀다, 바라밀 정진을
- 계간 《사이펀》 2020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