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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옛날엔 외 2편 / 울산민족문학17호

by 정소슬 posted Nov 25, 2019
옛날엔


2.jpg


밭 나간 어머니
저녁밥 지으러 오시는 길에
머리 가득 이고 온
노을로
불 지펴 밥을 짓고
방도 데우고

꺼먹밤에야 돌아오시던 아버지
한 지게 철철 어둠을 지고 와선
방마다 깔아두고
그 속으로 도깨비 껴들까 봐
우리 잠들 때까지
새끼를 꼬면서 밤새 지키고 계셨네






재활용품 분리작업 하던 날에




칠순 노파가 아파트 지하에 모인 주민들 틈에서 재활용품 분리작업을 하고 있다 종이는 종이대로 비닐은 비닐대로 각기 제 몫을 마친 쓰레기들이 끼리끼리 모아져 부활의 길로 떠나갈 마대에 담겨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부활절이네
새댁, 내일 나랑 성당가지 않을래
저, 절에 다니걸랑요
그럼 오는 초파일엔 절에 가겠구먼
아뇨 그 날은 우리 애 생일이라서요

그만 입을 닫아버린 노파의 손이 다급해진다 단 한 마디 양보의 미덕도 못 배운 저 철없는 것이 부활의 뜻을 어찌 알까 아무도 재활용을 흥정해오지 않는 그녀에게 이렇게 쓰레기더미 속을 뒹구는 일에 끼워주는 것만도 감지덕지해야지
그녀가 종이박스를 접다가 삐죽 나온 못에 손가락이 찔려 피가 흐르는데도 노파의 화난 손은 도무지 멈추지를 않는다








벼락수고개
- 울산의 독립열사 김낙수(金洛綬, 1880.1.19-1919.6.2)



국가보훈처 공훈록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김낙수 : 경상남도 울산 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의 언양(彦陽)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중략)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이해 6월 2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내 어린 날 아버지께서
나무 한 짐 거하게 지고 나가신 뒤
꽃신 꼬까옷에 고추씨 배추씨 사 오던 곳,
가끔은 봉선화 해바라기 씨앗도 사와
조막손 조막 조막마다 쥐여주던 그곳,
빈손의 날이면 돌아오는 산길의 참꽃 한 다발
지게 춤에 발그라니 꽂혀있던 그곳,
언제나 내 꿈속에선 무지개 꽃동산이었던
참 선비의 양짓고을 언양,

1919년 4월 2일,
백년 전에도 2일 7일은 언양 장날이었나 보다
상북 하북 삼동 삼남 범서 두동 두서 산내 각 고을에서
장 보러 나온 사람들과 장꾼들로 발 디딜 틈 없던 장터가 술렁이더니

갑작 출렁, 출렁거리더니
장바닥을 훑고 가는 뜨거운 바람, 피 끓는 함성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서울 탑골공원에서 터진 만세 소리가 한 달만에
남도 끝 울산까지 밀고 내려와

"조선인이면 만세를 부르라!"
"만세를 부르라! 조.선.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이 날 언양 장에서 지펴진 불길은
이틀 후(4월 4일) 울산의 도심 병영 운동장으로,
다시 나흘 후(4월 8일) 남창 장터로 불붙었으니
온 울산이

"대.한.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훗날 울산에선
천도교인 주도로 이루어진 이 날의 4.2 언양 만세 거사를, 축구대회로 위장한 청년회 주도의 4.4 병영 만세 거사를, 학성 이씨 문중의 유림이 주도한 4.8 남창 만세 거사를, '울산의 3대 삼일만세운동'이라 칭하게 되는데

기꺼이 순교의 도화선을 감고 뛰어든 언양 거사에서
맨 앞줄 치뻗쳐 서서
"조선인이면 만세를 부르라!"를 피 터지라 외치며
다급히 출동한 일제 경찰과 투석전까지 벌이던 김낙수는
결국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게 되는데
갖은 고문과 학대로 시달리다 거사 두 달 만인
그해 6월 2일, 옥중 순국하시고 말았으니
한 떨기 꽃 되어 산화하시고 말았으니

아아, 내 꿈속에서 활짝 웃던 봉선화는
봉선화가 아니었나보다 해바라기가 아니었나보다
피다 만 단군 꽃, 무궁화였나보다
내 철든 뒤에야 알게 된 언양 장 가던 험하디험한
벼락수고갯길의 참꽃은
참꽃이 아니었나보다
피 토한 진달래, 산철쭉이었나보다

백 년이 흘러도 가파르기만 한
김낙수 고갯길에는
여전히
무궁화가 피고 지고 산철쭉이 지고 또 피고

*. 벼락수고개 : 울주군 언양읍 반천리에 있던 험한 고갯길로 범서 쪽에서 언양으로 가자면 반드시 넘어야 했던 가파른 절벽 사이로 난 벼랑길이다. 벼랑길의 바윗돌 사이사이에는 매화, 산벚, 무궁화, 진달래, 산철쭉 등등이 자생하고 있는데 아버지(범서읍 망성리)께서 가시던 30리 언양 장 길의 딱 중간쯤이라 아마 그 고갯길 어디쯤에서 쉬었다 가고 오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건너편에 새 도로가 뚫려 길이 폐쇄되었고, 바로 산등 너머에는 국립대학 울산과학기술원(UNIST)이 들어서 있다. 아마도 열사의 애국애족 시붉게 달구었던 시선은 그 등 너머로 향하여 조금은 열 식히고 계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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