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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선지국밥 한 그릇에 삼천오백 원 외 4편 / 《울산민족문학》16호

by 정소슬 posted Jan 2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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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국밥 한 그릇에 삼천오백 원





재래시장 안 소고기국밥집
선지국밥 한 그릇에 삼천오백 원이란다
주저 없이 들어가기엔
너무 싼 가격


싸다는 마트 식당에도 육천 원 이하 메뉴는 없고
소문난 냉면 한 그릇에 만이천 원이 뭐 비싸냐는데


저 삼천오백 원이 우리의 희망이고 보루다
저 삼천오백 원이 망하면 우리도 함께 망한다
저 삼천오백 원은


밥값이 아닌


사람 간의 정 값이고
함께 나누는 숨 값이고
실질적 체감의 엥겔계수이고
막장 경제의 카나리아지수이니까






걸레





나는 걸레다 나는 비정규직이다
반란을 꿈꾸는 미전향장기수이다
노동의 독이 밴 노동중독자이다
나를 충동질하여 내 노동을 빨아먹는 그들은
걸핏하면 내 귓등 간질이며 사랑을 주절거리고
가랑이에다 기름을 부어 떡메질 일삼는다
그럴 때면 그의 거친 숨소리에
덩달아 흥분하기 일쑤고
그의 다급한 정에 연민을 느끼기 일쑤고
그러다 그만 계약 연장에 동의해버리기 일쑤고


동의를 받아낸 그는 즉시
나를 구정물 속에 처넣어 인정사정없이 흔들어댄다
그간 얻어먹은 거 다 토해내라 윽박지른다
그 악덕 조항이 애초 기본규약에 숨어 있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지만
또 속았구나 후회하는 반복이지만
다 잠든 밤 구석에 처박혀
노동의 독물 빼내기만도 힘이 버거운
난치성 결벽증후군까지 품어 안고 살아가는
천형의


그러나 결코 포기되지 않는 봉기의 땀으로
꿈자리 늘 축축한
피톨마다
면면히 흐르는 비분 의열의 검은 피
나는 나는 외세 소탕꾼 아나키스트의 후예이다






그녀의 누드





그녀가 벗어놓고 간 누드,


옷이 스쳐 간 자리마다 녹이 뻘겋다
목걸이와 팔찌가 머물렀던 자리엔
이랑이 패여 강이 되기 일보 직전이다
귀걸이 걸었던 곳은 아예 떨어져 나가고 없다
매니큐어 발랐던 손톱과 발톱
립스틱 칠했던 입술 어느 곳 하나
성한 데 없다
황홀했던 그 날들의 흔적은 이제 모두
그녀의 상흔으로 둔갑해 있다
온전한 것이라곤
겨드랑이 털과 흉물로 변해버린 주름과
바싹 말라버린 태초의 샘 배꼽, 그리고
구조적으로 손닿질 않아 도도함으로 무장했던
등뼈의
초췌해진 능선만이


그녀도 누드를 벗어 던질 때까진
까맣게 몰랐을 거다 눈치조차 채지 못했을 거다
제 것이 아니었다는 걸
타인의 봉토였음을
마법에 걸린 몽유였음을
에덴동산 뱀과 놀아난 동고리였음을






김치의 맛





천형의 배고픔은 이미 떠나고 극적 입맛만 기억하는 목구멍으로 소금기 빼낸 김치에 밥을 싸 먹는다 소금간 간간하게 밴 새우젓 두어 마리 얹어서
돼지 비곗살 네댓 토막에 철 지난 김치의 신맛을 썰어 넣으면 찌개의 얼큰함으로 변신하고, 삭힌 홍어 살을 시큼한 묵은지로 쌈하노라면 도톰한 코끝 맛이 한껏 유유해지기까지 하는


별나고 별난 맛의
난장, 난장들
이 난장칠 맛의 오묘한 깊이를
우리 배달민족이 아니고서야
어찌 가히 알까


김치의 맛은 무 배추의 알토란 맛이 아니다
자린고비 소금 맛도 아니다
옹고집의 겨울 맛도 아니다
오히려 늦봄 같은
숨 끝이 순순해지는 입선入禪의 맛이다
불신과 적개심으로 생강마늘고추 범벅인 세상에
화해를 수행하는 해탈의 맛이다
과욕, 편법, 이기, 만용, 아집, 등등 우리의
잘못된 식탐을 순화하는 달관의 맛이다


반만년 곰삭은
배달의 철학, 배달 혼의


숨이다 지문이다 그 웅숭깊이다






감꽃 떨어지던 날에 내가 한 일





봄이 통째 휘청거리고 있었다
치마도 안 걸친, 요요한 꽃 풍문 하나로 봄 햇살을 독식한 것들 매화진달래개나리목련벚산수유노루귀복숭아살구조팝이팝… 하고많은 그 꽃년들이 봄기운을 몽땅 빨아먹고 나면 오죽했으랴 부치는 힘을


하늘 한 모금 강 한 모금으로 겨우 목만 축였는데 그만 배불러 버린, 가랑이 사이 몰래 기저귀 차고 하얗게 앓아대던 꽃이 있었으니
그러다 찔끔 한 방울 오줌과 동시에 까무룩 해우소 아래 아랫도릴 빠뜨리고 마는


나는 훌러덩해진 낯빛의 그 엉덩이들을 올려다보며 가없이 침 꼴깍이곤 했었는데
깜박 하룻밤만 자고 나면 감나무 아래엔 고년들의 오줌 지린 기저귀가 헤아리기 힘들 만큼 수두룩했으니
내가 한 일은


고년들 기저귀를 일일이 주워
지푸라기 기다랗게 끼워서는 툇마루 기둥 볕에 보송보송 말려주는 일, 그 일만이
유일한 내 일이었던
날마다 뽀얀 숨소리로 오금 저리던 때가 있었다


- 《울산민족문학》16호



울산민족문학 16호.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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