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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강순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by 정소슬 posted Feb 22,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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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집] 당신에게 선택되지 않을 권리

[머니투데이] 김정수 시인,  2020.02.22 07:00

 

<202> 강순 시인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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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강순(1969~ )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예기치 않은 이별로 인한 슬픔·미련·증오·연민과 같은 여러 층위의 감정이 혼재되어 있다. 시인은 죽음보다 깊은 고통을 마녀로 대표되는 동화적 상상력과 “미지의 문장”(‘시인의 말’)을 통해 시로 풀어내고 있다.

 

첫 시집 이후 20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을 읽다 보면 ‘아프다’, ‘견디다’, ‘망각하다’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가난을 수반한 고통으로 “내내 동굴 밖으로 나오지 못”(‘박쥐의 계절’)한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거나 ‘유언장’을 쓰며 “슬픔의 두께”(‘곶감이라는 이유’)를 잰다. “미천한 신앙의 힘”(‘수박의 신음’)으로 “작은 슬픔의 편린”(‘곶감이라는 이유’)과 “허공에 떠도는 소문”(‘빵의 꿈’)과 “십 년 묵은 우울”(‘애인을 주세요 -마녀 일기 3’)을 버틴다.

 

    물방울을 오래 바라보았다

     

     둥글게 둥글게 부풀어

     터지기 직전의 긴장한 내 몸이

     당신을 빠져나가지 않으려고

     당신 안에 버티고 있는 게 보였다

     

     어제를 겨우 빠져나와

     하루를 지구에서 보내고

     오늘도 어떤 행성을 찾지 못해

     지구에서 또 하루를 버티는

     

     톡,

    표면에 닿으면 사그라질 듯

     잠시 내게 얼굴을 보여 주는

     기억

     

     아직도 나는 지구를 사랑하나 보다

     

    - ‘표면장력’ 전문

 

 표면장력이란 액체의 표면이 가능한 한 작은 면적을 차지하기 위하여 스스로 수축하려고 작용하는 힘을 말한다. 이 시에서는 한때 사랑했던, 나를 떠난 당신을 잊으려 시도하는 마음의 정리나 그런 시도라 할 수 있다. 당신은 “나보다 더 매력적인 대상”(‘질투의 메커니즘’)의 유혹에 넘어가 나를 버리고 떠났다. “내게 총”(이하 ‘타종’)이 있다면 “당신에게 총을 쏘”아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

 

금방 터져버리는 “물방울을 오래 바라보았다”는 것은 실제 물방울을 바라본 것이라기보다는 당신을 오래 알았다는 의미에 가깝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물방울과 같은 존재인 줄 알면서도 “둥글게 둥글게” 사랑을 부풀렸기에 당신이 나를 떠나고 나서도 “당신 안에 버티고 있는” 미련한 나를 보는 심정은 복잡다단하다.

 

사랑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난 감성이다. 당신은 떠났지만 난 아직 당신을 보내지 않았다. 물방울(당신) 안에 든 공기(나)와 다르지 않다. 당신을 떠나 살 수 없을 것 같은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견딘다. “잠시 내게 얼굴을 보여 주는/ 기억”은 미련이다. 하지만 “표면에 닿으면” 금방 사라질 물방울이기에 그 미련은 오래 가지 않는다.

 

    그네에 앉았는데 한 여자, 같이 앉는다

     시소로 옮겨 가니, 따라온다

     미끄럼틀로 옮겨 타니, 옮겨 탄다

     

     시간을 접었다가 굽이굽이 펴면

     그 여자, 웃음을 피우며 더 젊어진다

     공간을 말았다가 조금씩 펴면

     그 여자, 아지랑이처럼 가벼워진다

     

     천년 기억처럼 펄럭인다, 그 여자

     나를 아는 듯 모르는 듯 구름을 가로질러

     백만 년을 죽지 않고 살아나

     놀이터 화단의 꽃들 위로

     

     그 여자, 날아가는 곳

     꿈을 접었다 펴는 곳

     목마른 말들이 촉수로 빨려드는 곳

     

     홀림이야

     부풀어 오르는 홀림이야

     나는 그 여자에게 손을 뻗는다

     

     여기가 어디지? 내가 왜 여기 있지?

    여기도 풍문이 맛있을까?

    나는 구름 위에서 배가 불렀어

     

     그 여자, 토끼처럼 입을 달싹인다

     꼭꼭 씹어라 계절이 남을라

     꼭꼭 씹어라 악몽이 남을라

     

     여자가 내 안으로 쏙 들어온다

     

    - ‘홀림 -마녀 일기 7’ 전문

 

“여러 개의 눈”(이하 ‘봄밤이 너무 꽉 차서’)을 가진 길을 걸어서 공원에 왔다. “길은 죽음을 흥정하는 곳”인지라 예까지 오는 것도 혼미했을 것이다. 겨우 “그네에 앉았는데”, 곁에 같이 앉는 “한 여자”는 나비 같다. 그네는 흔들리는 마음, 시소는 무너진 마음의 균형, 미끄럼틀은 자꾸 하강하는 심경을 나타낸다. 내 곁의 그 여자 또한 내 운명과 다르지 않음을 암시한다.

 

나비(여자)는 꽃(당신)을 유혹한다. 나보다 더 젊고 날씬한 그 여자에게 간 당신. 나비는 나를 따라오고, 옮겨 탄다. 당신의 옆자리에 나 대신 그 여자가 있다. 평생 같이 살자는 약속은 뜬구름 같은 것, 꿈도 미련도 함께 사라진다. 그 여자의 ‘홀림’에 내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그 여자에게 손을 뻗는” 순간 현실로 돌아오지만 여전히 낯선 현실이다. 꿈이 현실인지, 현실이 꿈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과 집착 다 버리고, 물아(物我)의 구별도 잊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당신이 떠난 후 풍문(소문)과 악몽에 시달릴 뿐이다. 그 와중에 “여자가 내 안으로 쏙 들어온다”는, 다시 말해 나도 그 여자와 다를 바 없다는 자각은 많이 아프다.

 

    버려진 운동화 같은

     귀를 주웠다

     

     누군가가 쓰다 버린 지우개 같은

     귀를 주웠다

     

     귀를 모았다

     귀들이 섞여 내 귀가 없어졌다

     

     귀를 만졌다

     기억은 활짝 꽃피지 못한 암갈색

     귀속에서 짐승 소리가 났다

     

     소문 속의 귀 소문 밖의 귀

     다 버리고,

     

    어느 새벽

     서랍에서 빛바랜 낡은 두 귀를 꺼내

     천천히 씻었다

     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막 피어나는 분홍색이었다

     

    - ‘귀를 씻었다’ 전문

 

 당연히 귀의 기능은 듣는 것이다.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줍는다. 한쪽은 “버려진 운동화 같”고, 한쪽은 “누군가 쓰다 버린 지우개 같”다. 둘 다 버린 것이지만 운동화는 이별을, 지우개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을 상징한다. “귀들이 섞여 내 귀가 없어졌다”는 것은 나에 대한 안 좋은 소문으로 인해 참을 수 없을 만큼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는 뜻이다.

 

귀속의 “짐승 소리”는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내면에서 들리는 소리다. 고통의 최고조에서 내지르는 야성의 소리다. 눈물 펑펑 쏟아내는 울부짖음이다. 다 쏟아내고서야 소문이나 악몽, 통증에서 초연해진다. 비로소 당신을 보낸다. 아니 “당신에게 선택되지 않을 권리가 있”(‘빵의 꿈’)음을 인식한다.

 

“어느 새벽”, “두 귀를 꺼내/ 천천히 씻”는다. “빛바랜 낡은 두 귀”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내 본연의 모습이다. 귀를 씻은 후에야 여러 층위의 감정에 초연해진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자 내 주변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 구석구석 막힌 곳이 뚫린다. 몸도 마음도 고요해진다. 물(物)과 아(我)를 구별하지 않는 나와 하나가 된다. 아니 잊는다. “막 피어나는 분홍”, 순결한 마음으로 “당신의 모든 문장”(‘혼밥 파티’)을 시로 쓴다. 서서히 20년의 공백이 메워진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강순 지음. 파란 펴냄. 152쪽/1만원.

 

출처 :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00219233442286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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