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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땅 끝에서 / 김종원, 이숙희

by 정소슬 posted Jun 05,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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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 끝에서 / 김종원


비를 맞으며
어둠이 내리는 산비탈 돌계단을
오른다
가슴을 닫고 자라는 여섯 살짜리 큰아들을
품안에 안고
어둠 속을 헤치며 땅 끝을 향해
식은 땀 줄줄 쏟으며
오르는 돌계단이 위태롭다
바다 저 멀리 보이던 섬들이 차츰 내 눈에서
사라져 가고
나는 무엇을 위하여 이렇게
가쁜 숨 몰아쉬며
달려 왔던가
여기 땅 끝에 서서
저 어두운 바다
바라다보면 볼수록
더욱 막막하고 미칠 것만 같은 금수강산
토말비(土末碑) 앞에 서서
나는 담배를 피우고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리고
이제 다시 어디로 가야 하는가?
비에 젖어 떨고 있는 아들을 힘껏 끌어안으며
절벽 아래 시커먼 바다를 바라보다
소스라치며 뒤돌아서는 나는


봄에 함께 오는 / 이숙희


쌍벚꽃이 봉숭아 꽃잎을 절구에 찧어
놓은 것처럼 떨어져 있는 날이
올해는 오월 일일이다
나는 동리 목월 문학관 뒷길에서
스물여섯의 아들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뉘이고 있다
이렇게 변할 젊은 연인은
드라이브 도중 사랑싸움이 일어났는지
남자는 담배를 피우고 있고
여자는 눈물을 훔치고 있다
사랑은 찧어도 꽃물이 흐르는
봄과 같으니
스물여섯 아들 오줌을
스스럼없이 뉘일 수 있는 엄마가 되어도
사랑은 끔찍이 좋다
봄이, 꽃이 그렇게 해마다 오듯이
사랑은 언제나 새것과 같다


rz_20160605_071520_r.jpg


불과 몇 달 사이 부부가 나란히 시집을 냈다.
먼저 나온 시집은 아내인 이숙희 시인의 『옥수수밭 옆집(2015.10, 시와소금)』이고, 반 년여 후 남편 김종원 시인의 『새벽, 7번 국도를 따라가다(2016.5, 시와소금』가 나왔다.
부부는 시를 매개로 하여 맺어진 명실상부한 시인 부부인데, 등단이란 말로 소개할라치면 김종원 시인은 1986년 시전문 무크지 「시인」에, 이숙희 시인은 같은 해 「한국여성시」에 시를 발표함으로 문학활동이 시작된 30년 이력의 중견 시인들이다. 그들은 그 후 <신시대의 시>동인으로 함께 활동하였고(그러다 결혼하게 되었고), 울산의 대표적 진보문학단체랄 수 있는 <울산작가회의>에서 나란히 활동 중이다.
그런데 두 부부의 첫 결실이라 해야 할 큰아들(상흠)이 선천성 장애를 안고 태어나 부단히도 애를 태운다. 두 시집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전국 지명이나 도로명 등은 그 까닭이다. 풍문으로 떠도는 '용하다'는 곳이란 곳은 어디든 달려가야 했던 흔적들이다. 이 사실을 알고 두 시인의 시를 읽으면 어느 시 하나, 어느 낱말 하나 안 아린 곳이 없다.



왕곡마을 / 김종원


아들을 만나러 가다
보았다
많은 세월 가슴에 담아 두고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그리운
이들의 이름처럼
정겨운
풍경들

어둠 속을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한 체
졸린 눈 부릅뜨고
7번 국도를 따라 달리고 또 달려
도착한 곳

아침의 미소처럼
싱그러운 얼굴과
따뜻한 표정들
마을을 향해 둘러 선
종아리 근육 단단한
장정 같은 산들과

모든 것 내려놓고
한바탕 이야기보따리 풀어놓고
어울려 노래 부르며
어깨 춤 등실 등실 추고 싶은
내 어린 날 코흘리개 소꿉동무들
얼굴만큼이나
정겨운
마을

강원도 고성군
왕곡마을

나는 오늘 우연히
이곳에 와서
오랜 친구들 대하듯
옛 이야기 도란도란 들려주는
이들을 보며

살아가는 일이 때론
리허설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 산당 앞에서 / 이숙희


나는 너만 바라본다
나에게 가슴 아픈 아들은 없다
열 손가락 중 새끼손가락이 가장 맛있고
이유 없이 웃을 땐 치가 떨리게
이쁜 너
나에게 가슴 아픈 아들은 없다
삼백육십오일 지나다니는 산길에는
가로등 불빛이 켜지고 산당 앞에는
간절한 차 한 대가 서있다
여름처럼 비가 내리지만 오늘은 추운 겨울
산당의 지화는 꽃분홍으로 화려하고
신이 오셨는지 몸을 뉘이고 싶을 만큼
안락하고 따뜻해 보인다
나는 삼백육십오일 가슴이 아프다



겨울 산당(山堂), 계절을 아랑곳 않는 지화(紙花)의 화려한 꽃분홍 앞에서 '나에게 가슴 아픈 아들은 없다'고 계속 되뇌는 시인(엄마)의 독백이 왜 이리도 아플까?
왜 이리도 가슴을 후벼파는 걸까?
아마도 자기최면이고 자기위안일 거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선 도저히 견디기 힘든 발악이고 발작일 거다.
내 어린 날 일곱 살 동생이 죽어 밤새 울던 엄마가 다음 날 아침 그 울음조차 내뱉지 못해 꺽꺽 숨차하던 모습 생생하다. 그 동생이 죽은 얼마 후 태어난 또 다른 동생이 잦은 간질 증세로 거품을 물고 아무 곳에서나 뒹굴곤 했는데 그때마다 집안이 온통 난장판이 되곤 하였다. 결국 그 동생도 사라졌다. 너무 가난하여 병원은커녕 약조차 제대로 쓰지 못하던 시절을 건너온 나로선 시인의 말들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저 푸른 오월의 보리밭에 서면·1 / 김종원
- 안면도에서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일이다
온 땅 가득 물결치듯 가슴 벅찬 일이다
가슴 섬뜩하도록 푸른 자유의 물결이다
오월의 따사로운 햇살에
맨 가슴 다 드러내 보이는
넉넉함이다 일렁이는 희망의 물결이다
때론 안타까움에 눈물 흘리고
또 때론 서로의 어깨를 다독거려주며
새 시대를 꿈꾸던 젊은 날의
기억들 저편으로
노을이 지고
그래도 아직은 가슴 속 뜨거운 불길이 남아
바람이 불면
바람에 온 몸 맡겨 일렁이며
제 자리를 지키려는 당당함이다
물결치듯 일어나는
이 땅의 미래다
저 출렁이는 거대한 파도는
가슴 시린 오월의 몸부림이다


땅 끝에서 / 이숙희


우리 땅이 눈물나게 아름다운 건 그리워할 곳이 있기 때문이다 너의 땀이 떨어져 1세기 후에야 파도에 휩쓸릴 것 같은 여기 하얀 전망대가 땅 끝이라지만 비바람을 무서워하지 말고 손을 높이 들어보렴 저 백두산 천지에서 손나팔로 힘껏 너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온 몸에 맑은 피가 흐르게 될 것이다 지금은 너를 키우는 일이 수평선에 가 닿을 만큼 아득해 보이지만, 우리 땅 첫머리에서, 우리 쪽을 마주보는 사람의 수평선보다야 그 아득함이 짧을 것이다 사람이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건 모든 것의 끝에서가 아니라 아픈 곳이 있기 때문이다



남들을 '끝'이라지만 그곳에서 희망이라는 '시작'을 내걸 도리밖에 없는 두 부부의 몸부림이다.
결코 희망을 놓지 않으려는, 
결코 희망을 놓을 수 없는 부모로서의 안간힘이다.

고향 동생이면서 학교 후배이기도 한 김종원·이숙희 부부의 가내 행복만이 충만하길 빈다.



<김종원>
kim_jong_won2.jpg
1960년 울산 출생. 1986년 시전문 무크지 「시인」 등단. 시집으로 『흐르는 것은 아름답다(1992년, 하락도서)』, 『새벽, 7번 국도를 따라가다(2016.5, 시와소금』등


<이숙희>
lee_sook_hee2.jpg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1986년 「한국여성시」로 등단. 시집으로『옥수수밭 옆집(2015.10, 시와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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