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속의 여자 / 이명윤
어디서 잘라야 할지 난감합니다. 두부처럼 쉽게 자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어딘지 서툰 당신의 말, 옛 동네 어귀를 거닐던 온순한 초식동물 냄새가 나요. 내가 우수고객이라서 당신은 전화를 건다지만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우수고객이었다가 수화기를 놓는 순간 아닌. 우린 서로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선생님, 듣고 계세요?'
'........네'
'이번 보험 상품으로 말씀 드리면요'
나와 처음 통화하는 당신은 그날 고개 숙이던 면접생이거나 언젠가 식당에서 혼이 나던 종업원이거나 취업신문을 열심히 뒤적이던 누이. 당신은 열심히 전화를 걸고 나는 열심히 전화를 끊어야겠지요. 어떡하면 가장 안전하게, 서로가 힘 빠지지 않게 전화를 끊을 수 있을까요? 눈만 뜨면 하루에게 쉼 없이 전화를 걸어야 하는 당신. 죄송합니다. 지금 저 역시 좀처럼 대답 없는 세상과 통화 중입니다. 뚜뚜뚜뚜.
- 『수화기 속의 여자』(삶이보이는창, 2008)
<이명윤>
1968년 경남 통영 출생.
2006년 전태일문학상에 '수화기 속의 여자'외 6편이 당선. 2007년 계간 <시안>으로 작품활동 시작.
2008년 시집 『수화기 속의 여자』(삶이보이는창).
<감상>
곳곳 매설된 낚시와 지뢰로 숨쉬기조차 힘겨운, 대체 믿을 수 있는 것이 어디까지일까 제 스스로조차 의심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믿음의 파괴, 관계의 해체... 이러다 공멸뿐일 거라는... 이런 세기말증후군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자본주의의 무한 식탐 탓이라는 이론들도 있으나
이념이나 체제는 언제나 정직성에 한계를 두지 않는 몰·잡식성으로 하여 들불처럼 번성하였다 끝내는 그 관성을 이기지 못하여 자멸하고 마는 밤하늘의 유성 같은 존재.
문제는 사람이다. 시인처럼
잠시 머뭇거려주는, 뾰족한 그의 말끝까지 소중히 보듬어주는,
그 마음씨만이
그 배려만이
너를 살리고 나를 지키는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이런 따뜻한 시가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