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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투사 시인 송경동의 꿈

by 정소슬 posted Mar 0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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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 시인 송경동의 꿈

[한겨레] 등록 :2021-03-06 04:59수정 :2021-03-06 11:02

[토요판] 커버스토리

거리의 시인 송경동

 

시인 운동가의 분노

“투쟁하던 시대가 지났다고요?

노동자 1100만명이 비정규직인

야만과 폭압적 사회로 변모해

화염병보다 과격해도 부족할 판”

 

“미투가 촉발한 성평등운동은

한국 사회 가장 소중한 혁명

‘내 안의 작은 괴물’들 벗고

타 생명체 존중하는 삶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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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 결국 남는 건 시죠. 그러나 저는 시보다는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인간답게 사람답게 사는 게 더 중요한 거지, 시인이라는 명예, 위상 이런 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봐요.” 송경동 시인이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쉼터 ‘꿀잠’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나도

여느 시인들처럼

꽃을,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

한 잔의 진한 커피

한 잔의 맑은 녹차와 어우러지는

양장본 속 아름다운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러나 나는 늘 거리에 서야만 한다

너희가 쓰다 버린 850만 비정규직 쓰레기인간들에 대해

노래해야 하고, 일손을 빼앗긴 350만 농민의 시퍼런 절망에 대해

노래해야 한다. (…)

 

다시 나는 거리에 서서 분노와 증오로

피 어린 시를 써야만 한다(…)” (‘한미 FTA는 내 시도 빼앗아간다’, 2007년)

 

▶ 우아함이 넘치는 아름다운 시구가 아니라 분노와 증오의 문장을 벼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송경동 시인은 명징한 언어로 오래전에 고백했다. 실제 약자들의 주요 투쟁 현장에 그가 없었던 적이 없다. 인간다움을 찾으려는 싸움터에서 그가 쏟는 말은 최고의 선동시이며, 그의 몸은 상대를 주눅들게 만드는 인간 병기다. 노동자들에게 힘을 주는 시를 더 쓰고 싶어 하면서도 강건한 운동가로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내는 ‘투사 시인’이다.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쉼터인 ‘꿀잠’에서 송 시인을 만났다.

 

인터뷰 며칠 전 확인차 전화를 걸었다.

“백기완 선생님 장례 치르느라 바빠서 엉겁결에 승낙하긴 했는데 어떤 인터뷰인가요?”

“송경동 시인의 삶과 문학 전반에 대한 얘기를 들으려고 합니다.”

“아, 그런 거였다면 수락 여부를 고민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네요. 저에게 초점 맞추는 기사는 부담스러워서요.”

배정된 지면을 내세워 물릴 수 없다고 압박하다시피 한 끝에 지난달 25일 오후 송경동(54) 시인(이하 호칭 생략)을 비정규직 노동자 쉼터인 ‘꿀잠’(서울 신길동)에서 만날 수 있었다. 오후 3시인데도 그는 점심 끼니를 미처 챙겨 먹지 못한 상태였다. “늘 정신없이 산다. 그러니 괜찮다”며 송경동은 바로 인터뷰를 하자고 했지만, 괜찮을 수가 없는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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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길에 당신이 지나온 영웅이 아닌 오늘의 동지여서 고마웠습니다.” 송경동 시인이 지난달 19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백기완 선생 영결식에서 추모시 ‘백발의 전사에게’를 울부짖으며 낭송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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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시인이 지난달 19일 서울 시청광장에서 열린 백기완 선생 영결식에서 추모시 ‘백발의 전사에게’를 낭송한 뒤 눈물을 흘리며 단상을 내려오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민주당 의원들에게 화난 까닭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및 김진숙(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복직을 요구하면서 진행한 47일간의 단식이 불과 10여일 전에 끝났다. 기간도 길었지만, 청와대 앞 길바닥에서 벌인 단식은 그야말로 혹독했다. 보안구역이라는 이유로 텐트는커녕 전기난로 등 전열기구 하나도 반입이 안 됐기 때문이다.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를 오르내린 날이 이어졌던 지난겨울의 강추위를 침낭 하나와 핫팩 몇개로 버텨야 했다. 몸을 짓누르는 눈을 털어내면서 일어난 날도 여러번이었다. 단식 뒤 일주일 동안 병원에서 긴급한 치료를 마치고 퇴원하는 날에 백기완 선생이 돌아가셨다. 송경동은 그길로 장례식장으로 달려가 사회장장례위원회 기획위원장을 맡아 꼬박 5일 동안 빈소를 지켰다. 그가 통과한 한겨울의 한기와 허기가 깡마른 몸과 시꺼먼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누가 감히 약속시간을 보챌 수 있겠는가. 꿀잠의 동지들이 급히 만든 흰죽 한그릇을 다 비우게 한 뒤 대화를 시작했다.

“단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호소할 방법이 없으니까 고공에 올라가고, 단식투쟁을 하는 거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어요. 김진숙 동지 문제는 언론을 통해서 알려졌듯이 명백한 국가폭력에 의한 부당해고였잖아요. 그러니 1차 책임이 애초부터 정부와 국가에 있기에 사회정의를 회복하는 차원에서라도 정부가 진즉에 해결했어야 하는 문제죠. 게다가 한진중공업을 법정관리하는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이니만큼 정부가 의지만 있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특별결의안 채택, 국가인권위원장의 권고, 국무총리의 입장 표명 등 김진숙 동지의 복직에 대해서는 이미 정치·사회적으로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고요. 그런데도 연말이 가까워지도록 이 정부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청와대를 향해 긴급하게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단식에 들어갔던 거죠.”

송경동, 정홍형 희망버스 집행위원장, 서영섭 신부, 성미선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김우씨 등 노동과 시민·종교단체 관계자 7명의 공동 단식과, 당사자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의 400㎞ 도보행진(부산~청와대 앞)이라는 두 갈래의 치열한 투쟁에도 불구하고 복직이라는 투쟁 목표는 아직 달성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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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시인은 서영섭 신부 등 6명과 함께 지난 겨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김진숙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단식을 벌였다. 38일째인 지난 1월28일 송 시인이 눈을 맞은 채 청와대 앞에 서 있다. 송 시인은 47일간 단식을 한 끝에 병원에 실려갔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화가 많이 나죠. 김진숙 지도위원 개인의 복직이 아니라 부당한 해고를 되돌린다는 상징적인 싸움이거든요. 투쟁 과정에서 더 화나는 것은 정권을 쥔 사람들의 생각이었어요. 단식 막판에 사회단체 대표단의 일원으로 박병석 국회의장을 면담하러 의장실에 갔잖아요. 청와대가 꿈쩍을 않으니 국회에라도 호소하려고요. 그때 민주당 의원들이 저보고 ‘세상이 바뀌었다, 그런 식으로 투쟁하던 시대는 지났다, 폭력적인 방법은 안 된다’고 훈계를 하더군요. 40일이 넘도록 굶어서 힘도 없는데다가 논쟁할 자리가 아니어서 정면으로 반박하지 않았지만, 전혀 동의가 안 되더군요. 혁명이든 투쟁이든 시대에 맞게 조금씩 변형할 수 있지만 어떤 방식만이 옳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하고픈 얘기가 있어요.”

조곤조곤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아니, 한국 사회가 민주화됐다고요? 비정규직이 1100만명인 사회인데요? 이들은 미래 자체가 없고 2년에 한번씩 잘리는 인생들이어서 피눈물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과거보다 더 야만적이고 더 폭압적인 사회가 된 거예요. 비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이런 폭압 구조에 맞서 저항하려면 과거 화염병 들고 싸우던 것보다 더 강력하고 더 급진적으로 싸워도 부족한 세상인 거죠. 그런데 이미 기득권이 된 이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가 그런 비참한 상황에 있더라도 그건 신자유주의 세계 질서에서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니 그건 니들 개돼지들이 감내하며 살아야 하고 그만큼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일이라고 보는 거잖아요. 그러면서 저항이나 투쟁을 하더라도 합리적이고 예의 바르게, 기성의 기득권 구조가 용납할 수 있는 정도로 공손하게 하라는 거죠. 본인들이 기득권의 입장에서 투쟁과 저항에 대한 관념을 그렇게 갖고 있다는 것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는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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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동 시인이 2010년 10월 서울 가산동 기륭전자 해고 노동자 농성장을 파괴하려고 진입하는 포클레인을 몸으로 막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물불 안 가리고 온몸을 던지는 싸움꾼

 

송경동은 투쟁하는 시인이다. 그가 싸우는 곳은 삶의 현장이며, 싸우는 대상은 돈과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는 자들이다. <꿀잠>과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등 그가 쓴 3권의 시집은 출간될 때마다 한국 문단에 파장을 만든 문제작이었다. 하지만 그는 문단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대신 노동자들의 장기 농성장에 함께 있거나 세월호 유가족 등 억울하고 가난한 이들이 오체를 던지는 길바닥, 분노한 시민들이 연대하는 광장에 늘 머문다. 평택미군기지 이전을 막기 위한 대추리 대추분교 싸움(2006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촛불시위(2008년),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2008년), 용산 철거민 참사 사건 투쟁(2009년), 기륭전자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2010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투쟁(2011년), 쌍용자동차 투쟁(2012년), 세월호 참사 투쟁(2014년), 노동법 개악 저지 투쟁(2015년), 박근혜 퇴진 촛불혁명(2016~2017년) 등은 그가 가담했던 대표적인 싸움들이다.

이런 그를 두고 보수언론과 과거 정부의 경찰은 ‘전문시위꾼’, ‘싸움꾼’, 심지어 ‘자해공갈단’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그는 싸울 때는 앞뒤 재지 않고 온몸을 던진다. 구로공단의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회사 쪽에서 포클레인을 동원해 철거하려 할 때 그는 굴착기의 관절 속으로 자신의 다리를 끼워넣은 채 저항했으며, 또 한번은 쳐들어오는 용역들에 맞서 포클레인 위를 지나가는 전깃줄에 매달려 싸웠다. 여차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는 상황에 질린 경찰과 용역들이 결국 물러났다. 대추리 분교 투쟁 때는 경찰이 던진 벽돌에 맞아 머리가 깨져 병원에 실려갔으나 상처에 반창고만 붙인 채 또다시 싸움 현장으로 달려갔다. 촛불혁명 때는 자칫 군경의 진압 탱크에 깔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광장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서 광화문 캠핑촌을 앞장서 만들고는 넉달 반 동안 그곳에서 살았다. 김진숙 복직, 파인텍 노동자 투쟁 때 등 힘없고 약한 이들의 싸움을 위해 두번이나 단식에 돌입한 것도 송경동의 심장이 얼마나 뜨거운지를 잘 보여준다.

“내 싸움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심히 싸우느냐 사람들이 묻곤 해요. 왜냐면 저 역시 투쟁의 당사자이기 때문이죠. 내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세상이나 인간관계, 사회관계를 이루기 위한 일이거든요. 부당한 노동탄압이나 분배구조, 폭력적인 권력관계를 부수기 위해 함께 싸우는 거지, 직접적으로 피해를 당한 그들의 투쟁을 착한 시민으로서 제가 도와준다는 생각은 전혀 없어요. 그런 것은 어찌 보면 건방진 얘기일 수 있고요. 새로운 공동체나 국가의 모습 등 제가 꿈꾸는 세계를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연대해서 가는 거죠. 그 과정에서 제 몫의 실천과 연대를 보태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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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10일 2차 희망버스로 부산 한진중공업에 내려간 송경동 시인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고공농성 중인 타워크레인 앞에서 참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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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 희망버스’를 기획한 송경동 시인이 2011년 11월15일 오전 경찰에 자진 출석하기 앞서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생전의 백기완 선생이 그의 오른쪽에 서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송경동은 2008년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네트워크’(비없세)를 만들어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제기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넘어 멀리 자본주의적 질서 극복에까지 가 있다.

“제가 꿈꾸는 사회는 과거 개념으로 보면 일종의 사회주의적인 이상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싶긴 해요. 인류가 한번 그런 실험을 해본 결과 그 자체도 모순이거나 실수, 실패가 있기는 했죠. 그러나 모두가 조금은 더 행복하고 서로 존중되고 자기 자신을 자긍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꿈, 그런 가치나 지향으로서의 사회주의적 이상과 꿈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 아닌가 싶어요. 내용적으로는 어찌 됐든 간에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독점적인, 차별적인 구조를 넘어서야 하는 게 제1의 과제라고 봅니다.”

철 지난 얘기라고들 하는 혁명을 꿈꾸는 걸까.

“맞아요. 저는 그런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인 것 같고요. 제가 아직 수양이 부족해서 스스로 혁명가나 전사, 투사 이렇게 붙이는 것은 굉장히 조심스러워요. 20대부터 구로공단에서 30년 넘게 사회운동을 계속해왔지만, 제 입에서 혁명이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써본 적이 없어요. 그런 말을 쓰려면 정말 혁명가처럼 살아야 하는데 저는 아직 학습이든 실천이든 결의든 그런 것에서 부족한 것이 많은 듯해서 늘 부끄러움이 있어요. 저의 결의나 이런 게 좀 더 높아진다면 어느 순간에는 그런 경외스러운, 범접하기 힘든 삶으로도 가보고 싶은 생각은 있죠.”

 

 

 

전교 꼴찌를 노렸던 아웃사이더

 

송경동이 꿈꾸는 새 세상은 자본주의 대안에만 고정돼 있지 않다. 삶과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시인의 생각과 실천은 여성주의와 생태혁명의 한복판에 가닿아 있었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는 사회혁명 중 하나는 미투로 촉발된 성평등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박근혜 퇴진보다 더 중요하고 소중한 혁명인 거죠. 저도 가지고 있을 작은 박근혜 같은 나, 작은 김기춘 같은 나를 되돌아보고, 인간관계나 권력관계, 억압과 차별, 배제 이런 것을 바로잡고 성평등으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일부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주장이라면서 그 의미를 폄하하고 축소시키고 있죠. 참 너무하다 싶어요. 기후위기와 관련해서도 새로운 각성이 필요하다고 봐요. 코로나는 생태계가 파괴돼서 발생하는 자연의 발악 같은 거잖아요. 앞으로 새로운 변이나 위험들이 계속 생겨날 거고요. 그래서 인간 중심으로 자연을 대상화해서 무한한 생산과 과잉소비로 우리의 터전인 자연을 훼손해왔던 문명의 전환을 이뤄야 해요. 자연과 공존하면서 다른 생명체들을 존중하는 삶을 사는 것 말이죠. 이런 과제들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과 동일하게 중요한 일입니다.”

 

운동가 시인의 문학

 

“노동문학 마당 펴려고 애썼으나

거기서 춤추려는 사람은 적더라

나라도 ‘전선의 광대’ 되려고 나서”

 

“시를 무엇보다 사랑하지만

시인이라는 명예·위상보다

사람답게 사는 게 더 중요

어떤 경우엔 시를 버릴 수도”

 

송경동은 1967년 전남 보성군 벌교읍 장터에서 장사하는 집안의 3남1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바닥이 질척거리던 장터, 악다구니 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등 주변 환경도 열악했지만, 아버지의 도박과 이로 인한 가정불화로 집안 분위기가 늘 “습지고 어두웠다”. 그런 서민들의 삶은 송경동 문학의 자양분이 됐지만, 어린 송경동에게는 힘들고 괴로웠다. 그가 청소년기에 유일하게 받은 칭찬의 말은 중학교 2학년 국어시간 때였다. 숙제로 써 간 ‘봄비’라는 시를 본 선생님이 “너는 시를 잘 쓰는구나. 앞으로 시를 쓰면 좋겠구나”라고 격려했다. “나도 잘하는 것이 하나 있구나”라는 생각을 가슴에 품은 아이는 시간 날 때마다 학교 도서실에서 여러 책을 읽곤 했다.

광주에 있는 인문계 고교로 진학한 송경동은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행히 문예반 활동에 정을 붙였지만, 2학년 때 광주시 고교 연합 시화전을 준비하던 중에 5·18과 관련된 학생들의 작품을 이유로 학교에서 야단을 맞은 뒤 문학에서도 한참 떠나야 했다. 그나마 마음 둘 곳을 잃어버린 송경동은 밤이면 도시의 뒷골목을 왈패들과 함께 쏘다니는 등 방황했다.

“여러가지가 싫어서였겠지만, 부모와 권위에 대한 반항심 등으로 뭉친 문제아였어요. 모범생과 거리가 먼 아웃사이더였어요. 자학하느라 일부러 위악적으로 굴었던 것 같아요. 호적을 파 오겠다고 하기도 했고, 학교에서는 전교 꼴찌를 목표로 해서 시험 때 책상을 아예 복도로 빼버린 채 밖으로 놀러 다니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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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고 약한 사람들의 투쟁 현장을 지키는 송경동 시인이 지난달 25일 오후 서울 신길동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쉼터인 ‘꿀잠’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현장 화장실에서 했던 시 공부

 

고교 졸업을 앞두고 그는 돈을 빼앗는 철없는 사고를 쳤다. 당시 쫄딱 망했던 아버지는 변호사를 구하지 못했고, 송경동은 꼬박 2년을 소년원에서 보내야 했다. 그곳에서 문맹반 반장을 맡아 한글조차 모르던 또래 원생들을 가르치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실과 사회적 불평등의 실상을 목격했다. 그러나 눈으로 목격하고 몸으로 경험한다고 해서 바로 깨달음이나 삶의 전환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1987년 출소한 뒤 서울로 올라갔지만, 술집 삐끼 생활을 하거나 파친코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파친코 단골 손님의 권유로 고전무용도 잠시 배워보고 했는데 이런 삶은 아니다 싶어서 부모님이 이사해서 살던 순천으로 내려갔어요. 전과자라는 낙인과 멍에에서 놓여나서 그저 평범하게만 살 수 있었으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어요. 목수 조공 일을 배워서 새끼목수로 일하다가 더 많은 돈을 벌려고 여천 석유화학단지와 광양제철소 현장, 서산 석유화학단지 등 건설 현장에서 플랜트 배관공, 용접공으로 일했어요. 조금이라도 더 벌어서 잘살아보는 게 꿈이었으니까 죽어라고 일했죠. 잔업 좀 시켜달라고 현장소장한테 제가 부탁하고, 철야도 자청할 정도였죠.”

돈벌이에 재미가 붙어가던 즈음의 어느 날 저녁 공사 현장이 있던 충남 서산의 어두운 골목을 지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을 차로 치어 부상을 입히고 말았다. 보험기간이 끝난 줄도 모르고 차량을 끌고 다니다 낸 사고였다. 이 일로 또다시 3개월 징역살이를 하고, 그동안 모았던 돈은 합의금으로 몽땅 다 날렸다. 이 일을 겪으며 “다시는 돈을 좇아서 살지는 않겠다”고 다짐했다.

“노동의 과정과 애써 일했던 시간이 돈으로 환산되긴 해도 별안간 아무것도 안 남는 것을 보고는 그냥 열심히 일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어차피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면 노동을 하더라도 내가 해보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중학교 이후 마음속에만 품고 있었던 시 쓰기가 떠올랐다. 그때 우연히 비인가 ‘한길문학학교’의 학생 모집 광고를 봤다. 1991년 하반기에 문을 연 한길문학학교는 정희성, 이시영, 김남주 시인 등 진보적 문인들이 중심이 돼서 ‘한국의 고리키 문학학교’를 표방했다. 송경동은 그게 뭔지도, 선생인 문인들도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고 김남주 시인을 이름이 비슷한 김남조 시인으로 착각했다. 송경동은 원서를 낸 뒤 불합격하면 해외 건설 현장으로 나갈 생각이었으나 다행히 합격이었다. 아버지에게 차비 3만원을 빌려 옷가지 몇개를 담은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1991년 여름 상경했다.

“서울 강남에 문학교실이 있었는데 저는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까 야간을 신청했어요. 낮에는 건축 현장 등에서 이른바 노가다 일을 하고, 저녁 수업에 참가했어요. 일주일에 두번 수업에 갈 때는 나름대로 깨끗이 씻는다고 씻었는데 손톱 밑에 기름때와 흙이 새까맣게 끼어 있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얼마나 창피하던지 수업 시간 내내 손을 동그랗게 말아쥐고 있었어요. 잠이요? 처음에는 돈이 없으니까 신축 중이던 건물 지하 콘크리트 바닥에 스티로폼 깔고 잤어요. 일용노동자들이 묵는 잡부 숙소에도 있었고, 나중에는 지하철 공사장 함바 숙소에서 오래 있었어요. 지하철 공사장에서는 보통 20m 높이의 철골(H빔) 위에서 지지대 등을 용접하는 일을 주로 했어요. 폭 30㎝의 좁은 철골 위를 걸으면서 하는 작업이 위험하다면 여러명이 자는 숙소에서 책 펴놓고 공부하는 것은 고역이었어요. 창피하기도 하고 이상한 놈으로 비칠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잘 때 촛불을 켜놓고 주로 공부했죠. 일하다가 쓰고 싶은 글감이 떠오르면 작업 현장의 화장실에 달려가서 쭈그리고 앉아 아무 종이에나 끄적거리곤 했어요. 그게 저의 시 공부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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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살기 전에 삶을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송경동 시인이 지난달 25일 ‘꿀잠’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면서 자신의 삶과 문학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남들 떠날 때 구로공단으로 가다

 

“…전철이나 버스 손잡이를 잡지 않던 손/ 악수하기를 꺼리던 손/ 손톱 밑에 검은 때가 끼어 있던 손/ 괭이가 박혀 있던 손”(‘손’)이라며 손톱 아래 낀 때를 지닌 자신을 부끄러워했던 송경동은 문학 공부를 하면서 180도 다른 눈을 가지게 됐다. 때 묻은 노동자들의 손은 이제 그에게 “어이, 하며 저쪽 철골 위에서 환하게 흔들던 손/ 야, 임마 하며 반가워 손아귀를 꽉 쥐면 얼얼하던 손/ H빔 위에서 떨어질 뻔한 내 등을 꼭 붙잡아주던 그 손”(‘손’)으로 다가왔다. 그러니 이듬해인 1992년 노동자들이 많은 서울 구로공단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자연스러웠다.

“문학교실에서 김윤태 문학평론가한테 ‘구로노동자문학회’라는 게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 이곳이 내가 배우고 일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987년 민주화 이후 전국 여러 곳에서 생긴 노동자문학회 중 하나였죠. 저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노동자들 곁으로 가고 싶었고, 현장 노동자로 살면서 주변 노동자들의 삶을 써보고 싶어서였어요. 그러나 당시 소련이 무너지는 등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붕괴하던 시절이어서 운동하던 사람들이 구로공단을 떠나가던 때였어요. 제가 노동의 중심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니까 ‘시대가 변했어. 아직도 노동문학을 하려고 해? 정신 차려’라고 충고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송경동은 구로공단에서 노동자 문학교실 등을 열어 노동자들의 글쓰기를 돕고 지역운동에도 앞장섰다. 일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던 그는 1998년 진보생활문예지인 <삶이 보이는 창>을 몇몇 작가, 활동가들과 함께 만들어 7년 가까이 상근했다.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글쓰기를 목표로 한 <삶이 보이는 창>은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 김진숙씨의 글이 <소금꽃나무>로 묶이기 전에 이를 찾아 싣기도 했다. 송경동은 또 ‘여성 노동자 글쓰기 교실’과 ‘르포문학교실’ 등을 만들어, 청계천 도시빈민들의 르포집인 <마지막 공간>과 용산 참사 당시 철거민들의 삶과 투쟁을 다룬 르포집 <여기 사람이 있다> 등을 출간하는 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그는 자신의 역할을 노동문학의 ‘마당지기’이자 노동자들과 운동가들의 활동 공간을 이어주는 ‘실무자’로 스스로 위치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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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서울 신길동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쉼터 ‘꿀잠’에서 송경동 시인이 흰죽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있다. 꿀잠의 상근자들이 47일간의 단식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그를 위해 묽은 죽을 만들었다. 장철규 선임기자 chang21@hani.co.kr

 

“저는 20대 때 내 글을 쓰려면 세상이나 사람들에 대해서 좀 알아야 한다, 제 개인 작품은 마흔쯤 돼서 한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있었어요. 제 개인이 시인이 되는 이런 것에 대해서는 급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제가 무엇을 한다기보다는 많은 문학인들이 첨예한 사회운동이나 사회적 의제에 함께 발을 딛고 예민한 정치적, 사회적, 역사적 상상력과 문화적 상상력을 같이 이야기하면서 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걸 위해서 노동문학이나 참여문학을 하는 데서 실무자로 사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었던 거죠. 그런데 그런 마당을 아무리 깔아놔도 사람들이 거기에서 놀려고도 않고 거기서 춤추려고도 않더라고요. 외롭고 쓸쓸했죠. 그래서 나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뒤늦게 조직 활동가처럼 기본적인 투쟁은 하되 문학 쪽으로도 현장에서 필요하다면 그때그때 싸움을 위해서 글을 쓰자고 마음먹었죠. 누가 나에게 이 길을 가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이제 내가 전선의 광대처럼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고 전국의 투쟁 현장을 다니기 시작했죠. 첫 시집(<꿀잠>, 2006년)이 마흔살에야 나왔으니 저와의 약속은 지킨 셈이죠.”

노동자 시인 송경동의 시는 쉽다. 노동자의 일상을 그린 시, 노동 차별과 배제를 고발하는 시, 투쟁을 선동하는 시가 모두 미학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선명하다. 동료 노동자들이 읽어주기를 가장 바라고 쓰기 때문이다.

 

“(…)

산재 추방의 날에 읽을 시 한 편 써달라는 얘길 듣고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자본주의를 추방하지 않고

산업재해 없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생각하면 이렇게 간단한데 그것이 왜 이다지도 어려울까

나와 우리가 진정으로 겪고 있는

가장 엄중한 산재는 이것이 아닐까

더 이상 희망을 말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를 꿈꾸지 못하는

이 가난한 마음들, 병든 마음”

(‘나의 모든 시는 산재시다-세계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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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2017년 겨우내 송경동 시인은 박근혜 퇴진을 위한 문화예술인 광화문 캠핑촌을 앞장서 만든 뒤 넉달 반을 노숙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속화되지 않도록 애쓰면서 살 뿐”

 

송경동은 시를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 시보다는 노동자와 서민 등 약자들의 삶에 함께 있는 것을 더 중히 여긴다.

“제게 마지막으로 남는 건 시일 거라고 생각하죠. 가수의 정체성은 노래이듯이 시인에게는 결국 시가 남는다고 봐요. 그런데 그 시는 사회나 삶하고 동떨어져 있지 않아요. 혼자 골방에 있으면서 쓸 수 있는 시는 없을 거예요 아마. 저는 지금도 가끔 기운 빠지고 그럴 때는 시장이나 공구상가 이런 데를 가면 기운이 불쑥불쑥 나요. 그런 사람들의 삶을 보고 배우고 느끼면서 그걸 제 마음에 담아서 반영하는 게 시잖아요. 그런 매개 역할을 제가 하는 거고요. 그래서 저는 시를 살기 전에 삶을 살아야 한다고 봐요. 시 이전에 그렇게 알아야 할 것들, 접해야 할 것들, 만나야 할 사람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이 나중에 제가 쓰는 시로 묻어나고 반영이 되겠죠. 거리나 투쟁 현장에 제가 빠짐없이 있는 이유죠. 그런 저를 보고 어떤 이들은 ‘송경동은 시보다 투쟁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고 말하는데 그 말은 맞기도 해요. 왜냐하면 저는 시보다는 삶 자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인간답게 살고, 사람답게 사는 게 더 중요한 거지, 시인이라는 명예, 위상 이게 더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봐요. 어떤 경우에는 시를 버릴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시를 버릴 수도 있다는 시인, 시인으로 우뚝 서기보다 좋은 운동가나 활동가가 먼저인 사람. 한국 문학계에 모처럼 등장한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손사래를 친다.

“올바른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과거에도 그런 삶을 살았죠. 일제 치하에서 윤동주 시인이나 이육사 시인은 감옥에서 죽었잖아요. 1970년대 김지하 시인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독재와 반민주에 저항해 살았고요. 80년대에는 더 많은 문학인들이 아예 어떤 경우는 문학을 내려놓고 현장에서 노동자나 활동가로 들어가서 자기 존재를 지우고 사회변혁을 위해 살았죠. 김남주 시인처럼 그런 경험과 삶 속에서 좋은 문학작품들이 나오고 그런 것이었어요. 저도 올곧은 사회와 공동체의 삶과 함께 가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 되려고 쫓아다니고 있고요. 편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망은 생명의 본성이기에 조금만 게을리하면 그렇게 속화될 수 있고 삶이 보수화되거나 가식적으로 될 수 있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현장 실천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저 자신을 지켜나가려고 노력할 뿐입니다.”

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녹취 홍혜원

 

출처 : http://www.hani.co.kr/arti/society/labor/98566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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