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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 문병란 선생님 전 상서 제22신

by 정소슬 posted Jul 1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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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란 선생님 전 상서 제22신

 

 

 

    문병란 선생님 전 상서

     

     

    펜을 쥐고 아무리 기다려도

    편지가 쓰여지지 않는 밤입니다.

    편지 대신 묵은 시편들 뒤적이며 이리 칼질 저리 바느질해보며 언제 이 숙변이 속시원해질까 끙끙대는 밤입니다.

     

     

     

    마른날에 비오면 / 정소슬

       

       

      마른날에 비오면

       

      꽃은 호들갑 떨며 화장을 고치지만

      쇠파리들은 소 뱃가죽에 붙어 생피 빨지만

       

      하루살이들은 빗방울에

      맞아

       

      죽고 말지, 마른날에

       

       

       

    보라 비오는 날 / 정소슬

       

       

      보라 비오는 날, 평소 등돌리고 앉아

      제 살기 바쁘던 풀들이

      비바람 몰아치자

      서로 기대어

      한 몸인 듯 버티는 모습을

       

      보라 비오는 날, 노상 우정을 과시하며

      어깨동무 일삼던 나무가

      비바람에 힘이 부치자

      마주한 나무 위로

      사정없이 올라탄 모습을

       

       

       

    그린피스 / 정소슬

       

       

      산에 올라보면

       

      넝쿨식물들이

      비탈의 붕괴를 막기 위해 안간힘일 때

      나무는

      그 비탈에 수직으로 정을 박아

      제 영역 확장에 혈안이다

       

      그래서

       

      나무를 타고 오른

      넝쿨식물들이

      그의 숨통을 조이는 거다

       

       

       

    누가 가르쳤나 / 정소슬

       

       

      먹다 만 빵 부스러기, 빈 봉지, 꽁초, 보고 난 신문, 씹다 버린 껌, 입안에 끓는 가래침, 애기 똥 기저귀, 돈담무심 내뱉는 욕설까지

       

      아빠의 세금이 치우고

      엄마의 자원봉사가 치우고

      내가 하는 봉사활동 점수가 치우는 거라고

       

      누가 가르쳤나

       

      공부에 바쁜 나는 치울 수 없고

      약속에 늦은 나는 치울 수 없고

      부끄러운 내 손은 치울 수 없다고

       

      다만, 내 버리는 일이

      또 하나의 일자리를 구제하는 거라고

       

      누가 그르쳤나, 대체

       

       

       

    단풍 / 정소슬

       

       

      물들지 않겠다고

      초지일관 하겠다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겠다던 젊은 날의 결기는

      공수표 된지 오래고

      떨어져 뒹구는 넝마는 결코 안 되겠노라, 그 맹세도

      허사임을 알아버린 시방

       

      붉은 속내만 자꾸 드러나는구나

      나도 나를 감당이 어렵구나

       

       

       

    천 년의 부처 / 정소슬

       

       

      돌은 닳아

      모래가 되고 먼지가 되는 게 아니다

      없어진 모서리

      안으로 말려들어가

      그 안에다 선방 차리고 결가부좌

       

      부도가 되는 거다 그래서

       

      천 년을 더 사는 거다

      천 년 동안 天年부처가 되는 거다

       

       

       

    담쟁이 / 정소슬

       

       

      알고 보면

      너도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고 있다.

       

       

       

    이발소에서 / 정소슬

       

       

      "손님,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웃자란 길이는

      모조리 잘라주세요!

       

      냉철함을 짓누르는 윗머리 모두와

      혜안을 가리는 앞머리 모두와

      지혜를 막고있는 옆머리 모두와

      방종을 부추기는 뒷머리 모두를

       

      남김없이 잘라주세요!

       

      "혹시 입산하는 길입니까, 손님?"

     

     

     

    마음에 차지 않는 시편을 주저리주저리 적어보았습니다.

    함께 동봉한 책은 울산 고래문학제에서 매년 펴내는 「2015년 고래와 문학」입니다.

    아직 장마 기간이고 태풍이 또 하나 올라오고 있다 하니 날씨의 변덕에 심신이 상하지 않으시길 빌어 올립니다.

     

    2015년 7월 15일

    울산에서 정소슬 배상.

     

     

    첨부 : 「2015년 고래와 문학」--- 1권

     

 

Who's 정소슬

profile

브랜드 : 정소슬
메이커 : 1957년식 울산 産
성능/직업 : 비정규직
취미 : 긁적이기, 똥폼으로 사진 찍기
잡기 : 음치, 몸치, 길치... 등 중증 치과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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