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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일제강점을 통해 배우다] (4) 뼛속까지 달랐던 그들의 선택

by 정소슬 posted Aug 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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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을 통해 배우다] (4) 뼛속까지 달랐던 그들의 선택

일제 침탈 맞서 싸운 김원봉, 뼛속까지 일본인 된 박춘금

[경남신문] 기사입력 : 2019-08-27 21:05:00

 

 

 

  

일제강점기 수많은 이들이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의 길을 고민했다. 오늘 소개할 두 사람도 각자의 선택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쳤다. 한 사람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고, 다른 한 사람은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으로 살다 갔다. 바로 약산 김원봉과 박춘금이었다. 그들의 선택을 통해 일본의 경제적 침략으로 인한 현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짐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김원봉= 김원봉은 1898년 3월 14일 밀양에서 출생했다. 옆집에 살던 석정 윤세주의 아버지 윤희규가 지어준 원봉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는 1945년 조국이 해방되는 순간까지 일제와 싸웠다. 1911년 천장절(메이지 일왕의 생일)에 일장기를 변소에 빠뜨려 퇴학을 당하고, 다시 동화학교마저 폐교되자 서울의 중앙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스승이자 고모부인 백민 황상규로부터 약산(산과 같아라)이라는 호를 얻었다. 함께 공부하던 김두전은 약수(물과 같아라), 이명건은 여성(별과 같아라)이라는 호를 갖게 됐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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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이후 독일의 우수한 무기기술을 배우기 위해 중국의 톈진에서 독일어를 배웠으나 독일이 미국에 패하자 난징으로 건너가 금릉대학에서 영어를 배우던 중 고모부인 황상규의 부름을 받고 길림으로 이동했다. 고산자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에서 동지들을 규합해 길림으로 돌아와 1919년 11월 10일 ‘의열단’을 창단하고, 의백(단장, 큰형)이 됐다. 이후 23차례의 거사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그는 당시 최고의 현상금이 걸린 최고의 독립투사였다. 적과의 투쟁을 위해 동지들을 사지로 보냈던 김원봉은 ‘해방은 우리의 피와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결코 남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외교적 투쟁보다 무장투쟁으로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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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정이소 카드)에 부착된 의열단 초기 단체사진. 창립 직후로 추정된다. 김원봉 단장(오른쪽)과 단원들 이름이 적혀있다./연합뉴스/

 

작탄투쟁만으로는 일제를 몰아낼 수 없다고 판단한 김원봉은 대원들과 함께 황포도에 세워졌던 ‘중국국민당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해 체계적인 군사교육을 받았다. 이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해 3기에 걸쳐 125명의 전사를 양성해 대일투쟁의 선봉으로 삼았다. 시인 이육사와 음악가 정율성도 이 학교 출신이었다. 1935년 전 중국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해 조직한 조선민족혁명당의 중앙집행원 겸 서기부장을 역임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무한에서 중국 관내 최초로 조선인만으로 구성된 ‘조선의용대’를 조직하고 총대장에 취임했다. 1, 2구대로 구성된 조선의용대원들은 호남성 장사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최전방에서 활동했고, 각종 정보 수집과 공작 활동, 일본군 포로 신문과 선전 활동에 참여했다.

 

일본군과 직접 전투하기 위해서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는 화북으로 이동해야 한다는 대원들의 뜻을 따라 주력부대가 타이항산으로 이동했으나 김원봉은 그들과 함께 떠날 수 없었다. 충칭(重慶)에 남았던 김원봉은 임시정부와의 통합을 주장해 자신이 지도하던 조선의용대 본부지대는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성됐으며, 그는 제1지대장 겸 한국광복군 부사령으로 취임했다. 1944년에 한국광복군을 영도하는 군무부장(현,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며 인면전지공작대 파견 및 국내정진군을 편성해 조국에서 직접 일본과 전투해 그들을 몰아내고 항복을 받으려 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1945년 12월 2일 28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김원봉은 해방정국의 혼돈 속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지내다 1948년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월북했다.

 

이후 국가검열상(감사원장에 해당)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나 김일성 정권에 반대하다 숙청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공산당에도 조선공산당에도 심지어 북한에서 조선노동당에도 가입하지 않았던 약산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동안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는 중국국민당, 중국공산당은 물론 레닌의 자금으로도 폭탄을 제조해 강도 일본을 내몰고자 했던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으며 비운의 영웅이었다.

 

도서관에서 이반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 읽기를 좋아하고 톨스토이의 작품이라면 무엇이나 읽었다던 그는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사실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이름난 문학가로 역사에 남았을지도 모른다. 그가 즐겨 암송했던 헝가리 애국시인 페테피의 시를 통해 그가 지녔던 마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한다.

 

‘사랑이여!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목숨마저 바치리. 그러나 사랑이여! 조국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내 그대마저 바치리.’

 

◇박춘금= 박춘금은 1891년 4월 17일 양산에서 출생한 후 밀양에서 자랐다. 1905년 대구 병영에서 급사로 일했고,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가 노무자로 일하다 폭력배로 성장했다. 1917년 나고야조선인회 회장에 취임했고 1920년 3월 도쿄에서 이기동과 함께 조선인 노동자의 상호부조단체인 노동상구회를 조직해 회장에 취임하고, 이를 상애회로 개편해 도쿄총본부 부회장에 선임됐다. 상애회는 ‘민족적 차별관념 철폐와 일선융화의 철저를 기’하고 조선인 노동자의 정신 교화와 경제적 구제를 꾀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이 단체는 사이토 마코토 조 총독과 경무국장 마루야마 츠루키치 등이 후원해 오사카, 나고야 시즈오카, 교토, 조선의 경성, 부산, 강경 등지에 지부를 두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상애회 회원들은 시체 처리 등 복구 작업에 나서 일본의 환심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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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금

 

1924년 전라남도 하의도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하자 상애회 회원을 동원해 청년회를 습격했고, 1928년 하의농민회를 강제 해산시켰다. 1928년 상애회가 재단법인으로 승격되면서 이사에 선임됐고 이사장은 경무총감 마루야마가 취임했다. 1930년부터 본격적인 조선인 동화정책을 강조했고 1932년 제18회 중의원 의원 선거에 도쿄 제4구에서 입후보해 당선됐다.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이자 유일했다. 1936년까지 중의원으로 활동하며 지원병제도 실시를 청원했다. 1933년부터 광산을 경영했고 전국을 돌며 강연을 했다. 만주사변에 이바지한 공로로 훈4등을 서훈받았고 만주국이 주는 만주건국공로장을 받았다. 1937년 중의원에 다시 당선된 그는 ‘조선의 지원병제도 시행에 관한 청원’을 거론했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시국간담회를 주최하고 조선인에 대한 참정권 부여와 병역문제, 의무교육 실시 등을 논의했다.

 

1943년 국방비 1만원을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에 헌납했으며, 11월에는 릿교대학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외아들을 지원병으로 보냈다. 뿐만 아니라 매일신보사 주최로 부민관에서 열린 학병격려대강연회에서 ‘4000이나 5000이 죽어 2500만 민중이 잘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라며 학도병 출진을 독려했다. 1944년에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을 발기했고, 고이소(小磯國昭) 일본 수상이 조선에서 징병제 실시 등 조선에 대한 처우개선 문제를 언급하자, “우리 2600만 동포들은 당국의 뜻에 감격하여 더욱 황국신민이 되어 전쟁완수에 총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전국을 돌며 징용의 의의와 취지를 설명해 조선군참모장의 감사장을 받았다. 1945년 6월 대의당(大義黨)을 조직해 당수에 취임하고 7월 24일 부민관에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 조선총독 아베 노부유키(阿部信行) 등이 참석했으나 행사 도중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 세 청년이 시한폭탄을 터뜨린 ‘부민관폭파 의거’가 발생하자 대회는 무산됐다.

 

해방 후 일본으로 건너가자 반민특위에서는 맥아더 사령관에게 체포해 송환해 줄 것을 요청할 정도였다. 이후 도쿄 민단중앙본부 고문을 맡았고 1957년에 일한문화협회를 설립하고 1962년 아세아상사의 사장으로 재직하다 197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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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금이 중의원 선거에 당선된 후 모습. 오른쪽은 그의 일본인 아내./연합뉴스/

 

그러나 박춘금은 죽은 뒤 한국으로 돌아와 밀양에 묘가 만들어지고 그의 묘 앞에는 2m 높이의 송덕비가 세워졌으며 매년 청명절에 일본인들이 참배 오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고)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이 직접 밀양을 찾아 그의 송덕비를 발견하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송덕비 철거를 요구하자 그의 후손(그는 밀양에서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고 그의 후손들은 서울에 거주 중이다.)들이 묘와 송덕비를 철거해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 있다.

 

2002년 그의 송덕비는 사라졌지만 당시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실장과 필자가 함께 탁본해 현재 민족문제연구소에 보관돼 있다.박춘금은 살아생전 일본인들이 “뼛속까지 일본이다, 일본인보다 더한 일본인이다”라는 평을 받아 유일하게 중의원에 두 번이나 당선됐던 최고의 친일파였다.

 

최필숙 밀양고등학교 교사

 

출처 :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300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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