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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단군 영정에 남긴 남파 박찬익 집안의 독립운동

by 정소슬 posted Oct 0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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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흔적을 찾아서] 단군 영정에 남긴 남파 박찬익 집안의 독립운동

단군영정에 담긴 한국혼

[중부일보] 김성환 | 기사입력 2019.10.07 18:24 | 최종수정 2019.10.07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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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南坡) 박찬익(朴贊翊, 1884~1949) 집안의 독립운동

 

 최근 경기도박물관에 기증된 남파 박찬익 선생의 독립운동 관련자료 중에는 한 장의 단군영정이 있다. 반신상의 사진본으로 전체가 14.5×20cm, 영정만은 11.4×16.4cm 크기이다. 이 한 장의 사진은 박찬익 선생에게서 아들 부부인 광복군 박영준(朴英俊, 1915~2000)·신순호(申順浩, 1922~2009), 그리고 손녀인 박천민(朴天民) 여사까지 전해지다가 그 장소를 박물관으로 옮겼다.

 

박찬익 선생의 호는 ‘남파(南坡)’였다. 망명지 중국에서 고향 파주를 그리워하며 지었다. 그곳은 그가 되찾아야 할 조국이었다. 중국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길림·상해·북경 등을 떠돌며 언제 광복을 맞아 돌아갈 수 있을지 알지 못했던 그였다. 어쩌면 죽어서도 가지 못하고, 자식들도 자신과 같이 나라 없는 유망민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을 걱정했다. 단군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찾고자 했던 그는 나철(羅喆, 1863∼1916)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하여 정교를 맡았고, 예관 신규식(申圭植, 1879~1922)과 함께 상해에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나는 평생을 두고 내가 한 일을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고 또한 알아주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난 감투를 쓰고 싶다거나 출세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을 전혀 가져보지 못했다. 내가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무엇이든지 할 뿐이었지. 나는 기둥이나 대들보라기 보다는 남의 눈에 띄지는 않지만 또한 그것이 없으면 제대로 서기 어려운 주춧돌이 되고 싶었다.내 나라, 내 겨레를 위하는 일인데 그걸 누구에게 알리겠느냐, 또한 알아주기를 바라겠느냐. 주춧돌이 되겠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었다. 그러니 내가 죽거든 요란스럽게 떠들지 말고 조용히 아버님이 계신 망우리에 묻어 주려무나”.

 

그는 1945년 광복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에서 환국할 때, 중국 일대에 거주하고 있던 우리 동포들의 안전과 권익을 대표하기 위해 중국에 주재했던 주화대표단의 단장으로 활약했다. 지금으로 치면 주중 한국대사관 대사 정도였다. 독립운동 과정에서 박정일(?精一)·박창익(朴昌益)·박순(?純) 등의 별명을 사용했으며, 유창한 중국어 실력으로 임시정부의 대중국 외교를 전담하였다. 광복을 맞았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다툼으로 그 앞날은 혼미했다. 죽은 후 이봉창·윤봉길 등을 모신 효창공원의 독립운동가 묘지에 묻힐 것도 죄스러워 조용히 망우리에 묻히기를 바랐다. 그에게 광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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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韓末) 단군영정의 보급

 

 현재 단군영정으로 알려진 최고본은 1908년 정인호(鄭寅琥)가 지은 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에 삽화 형식으로 실린 ‘동국(東國)을 창립(創立)하신 단군(檀君)의 상(像)’이다. 또 1910년 일제가 앞세운 신궁봉경회건축소가 간행한 ‘신궁건축지(神宮建築誌)’에 수록된 대조선국시조 단군천황(大朝鮮國始祖檀君天皇)의 목판본 화상(畵像)이 있다. ‘신궁건축지’는 자료는 1909년 일제와 친일파들이 단군과 일본 신도(神道)에서 천황의 가계가 유래했다고 하는 하늘의 여신(女神)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 그리고 이태조(李太祖, 이성계)를 함께 모시는 일한신궁(日韓神宮)을 건립하려는 계획서 성격을 가진다. 이 자료에 실린 단군영정은 최소한 1909년 8월 이전에 이준용(李埈鎔)·이지용(李址鎔)·민영휘(閔泳徽) 등 친일파들에게까지 공식적으로 이용되고 있음에서 한말에 이미 그 유통범위가 넓었음을 알려준다.

 

1910년 9월 23일, 매일신보에서는 단군영정에 관한 보도를 하였다. 단군대종교(檀君大倧敎)에서 화가에게 3본의 단군영정을 모사하여 도사교본부와 남사교본부·북사교본부에 봉안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다. 단군영정의 봉안 목적은 단군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해 조선인들의 일체감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급을 위해 단군영정이 사진본으로 제작된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였다. 대종교에서는 이미 1911년부터 교인들에게 단군영정을 봉안하게 하기 위해 영정을 사진으로 인출하여 나누어 주었다. 신채호·김하구(金河球) 등이 권업회의 기관지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한 권업신문에서는 1912년 12월 15일 평양 숭령전(단군사당)에서 예부터 단군영정을 봉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숭령전에 봉안된 단군영정을 수년 전에 조선의 한 사진관에서 촬영했는데, 최병숙이라는 사람이 한 본을 구해가지고 있었는데, 그곳에 살고 있는 김태봉·함동철씨와 상의 끝에 중국인이 운영하던 이완사진관에서 다시 촬영하여 조선인들에게 한 본씩 봉안하게 함으로써 건국 시조를 기념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권업신문의 기사에서는 단군영정의 전래와 제작에 대해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조선 세종 때 창건된 단군사당인 숭령전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단군영정을 봉안하고 있었다. 둘째, 단군영정은 1912년 12월 당시에 이미 사라져 그곳에 봉안했던 영정이라는 사진본을 어렵게 얻어 현지 주민의 고증을 거쳐 재촬영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재촬영한 단군영정은 보급용으로 제작되어 배포되었다. 즉 단군영정은 1912년대 말부터 보급을 위한 휴대용으로 제작되고 있었는데, 그 가격은 한 본(本) 당 50전이었다고 한다.

 

현재 전하는 단군영정 중에 최고(最古)의 것은 부여 천진전에 모셔졌던 단군영정이다. 지금은 국립부여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대종교 남도본사의 지도자였던 강우(姜虞, 1862~1932)가 소장했던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부여 천진전 단군영정’은 1922년 개천절에 동아일보에 실린 ‘단군 천제의 영정’과 같은 화본(畵本)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들과 박찬익 집안 소장 단군영정은 많이 닮아 있다. 전신상과 반신상이라는 차이를 빼고는 거의 흡사하다. 안면과 수염의 표현 등에서 미세한 차이를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화본의 작품으로 보이지 않는다. 즉 박찬익 집안 소장본은 강우가 소장했었다는 부여 천진전 단군영정과 같은 전신상의 화본을 대상으로 상반신을 그려 인쇄한 것이다. 그리고 ‘박찬익 집안 소장 단군영정’과 ‘부여 천진전 단군영정’·‘단군 천제의 영정’(동아일보)을 비교할 때, 현재 전하는 3건 중에서 제작시기에서 앞서는 작품은 1917년 제작된 박찬익 집안 소장본이다. 하지만 보다 정확하게 말해서는 앞서 전해지고 있던 ‘부여 천진전 단군영정’·‘단군 천제의 영정’ 계열의 영정을 모본으로 반신상의 보급용 영정사진을 제작한 것이 ‘박찬익 집안 소장 단군영정’이다. 그 목적은 늘 가까이에서 봄으로써 단군을 중심으로 조선민족의 공동체 인식과 독립정신을 북돋는데 있었다. ‘박찬익 집안 소장 단군영정’은 현재 전하는 ‘부여 천진전 단군영정’ ‘단군 천제의 영정’의 편년을 제시하는 기준 작품으로, 동아일보를 통해 공개된 단군영정의 상한을 5년 이상 올려볼 수 있는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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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익 집안 소장 단군영정

 

 이 단군영정은 전체가 14.5×20cm, 영정만은 11.4×16.4cm 크기의 반신상이다. 정식명칭은 ‘단군대황조어진(檀君大皇祖御眞)’이다. ‘대황조단군’은 대종교에서 모시고 있는 단군에 대한 공식 명칭이다. ‘대황조’란 “가장 지극한 조상” 정도의 뜻으로, 조선 민족이 단군에서 출발하는 혈연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한 표현이다. 혹 ‘대황조단군성신(大皇祖檀君聖神)’이라고 극존칭하기도 한다. 우리민족은 대황조단군에서 출발하는 신성민족이었고, 그 역사는 신성의 역사였다는 백암 박은식의 ‘대황조단군론(大皇祖檀君論)’과 일치한다.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과정과 관련된 민족의 개념도 일정부분 포함하고 있다.

 

영정의 아래에는 “제강(帝降) 4374년, 건국 4250년 11월 17일(舊曆 10월 3일) 개천절 경축모임에서 삼가 만들다”라고 쓰여 있다. 1917년 개천절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하여 보급용으로 배포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제작의 주체는 대종교 서도본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제강(帝降)은 단군 이전의 신시(神市, 환웅) 시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미 조선 중기에 허목(許穆, 1595~1682)의 ‘동사(東事)’에서부터 단군의 이전 시대 로 설정된 바 있다. 그 4374년과 고조선 건국 4250년 사이에는 124년의 틈이 있는데, 대종교에서 설정하고 있는 고조선 및 단군에 대한 역년인식이 조선시대까지의 그것과 달랐던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남파 박찬익 전기에 따르면, 박찬익은 1911년 정월 대종교의 지교가 되었고, 2월 만주로 망명했다. 1915년 봄에 대종교의 상교가 된 그는 가을에 길림·북경·노령 등에 대종교 총본사 지회를 설립했다. 이해 11월 중국에서 대종교의 포교 금지령이 내려지자 해금 교섭도 진행했다. 대종교단에서 그는 망명 직후부터 단군의 위패나 영정을 모신 경배식에 참여하고 또 이를 진행했다. 이것은 망명 이후부터였을 것이다. 여기에서도 동아일보에 실린 ‘단군 천제의 영정’과 같은 종류의 영정이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이후 상해를 중심으로 신규식과 동제사를 결성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7년 가을에 그는 신규식과 상의 끝에 국내로 잠입을 결행했다. 목적은 개화파의 한 사람이었던 박영효를 독립운동에 끌어들이려는 것이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국내에서 안재홍·정두화·윤보선 등을 만나 독립운동자금의 조성과 윤보선의 유학에 대한 자문 등을 했다.

 

‘박찬익 집안 소장 단군영정’은 1917년 11월 17일(음력 10월 3일) 개천절을 기념해서 제작되었다. 앞서 밝혔듯이 이 영정에서 ‘대황조단군’은 대종교에서 단군을 지칭했던 공식적인 명칭이었다. 따라서 그 제작 주체는 신규식이 주관하던 상해의 대종교 서도본사였음이 분명하다. 대종교 서도본사는 1914년에 개설되어 신규식이 책임자였고, 1922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서도본사는 1922년 신규식 사후 서1도 제1지사와 제2지사(=호강시교당)로 구분되었는데, 전자는 박은식, 후자는 민제호가 책임(전무)을 맡고 신건식이 찬무로 있었다. 민제호의 동생 민필호에 관한 전기에 따르면, 호강시교당에서 매 주일마다 예배를 보았는데 박찬익이 참석하였다고 한다. 민필호의 장인이 신규식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단군영정도 이곳에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고 박찬익과 신건식도 이곳에서 얻어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영정의 인쇄·배포에 신규식과 동제사가 적극 관여했다는 것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신규식이 상해로 망명한 이후 1912년부터 대종교 서도본사는 매주 일요일인 경일(敬日)과 매년 어천절과 개천절을 맞아 기념식을 거행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단군영정을 봉안하고 모임을 가졌는지 알 수 없지만, 1917년에는 상해의 대종교인들에게 보급용 단군영정을 배포하여 개인적으로도 쉽게 봉안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역시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1917년 가을 이후 박찬익이 언제 상해로 돌아갔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전기(傳記)에 따르면, 그는 1918년 정월 2일 상해 동제사에 있었다. 그렇다면 1917년 11월 17일 상해에서 있었던 개천절 경축식에 그는 참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박찬익이 이 영정을 소장하게 된 것은 상해로 돌아간 이후 신규식에게 직접 전달받았거나, 함께 활동했던 다른 동지에게서 전해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이 영정은 나철이 등사했던 전신상 영정의 이본을 신규식이 상해로 망명하면서 가지고 가서 대종교 서도본사에 봉안했거나, 이를 토대로 현지에서 다시 제작했던 영정일 수 있다. 그리고 대종교 서도본사에서는 최소한 1917년 개천절에 즈음해서 그 영정의 상반신만 편집하고 다시 인쇄하여 경축식 참석자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동아일보에서는 상해에서 연례적으로 거행되었던 건국기념일‘개천절’의 경축식이 1925년 11월 27일 오전에 청년동맹회와 일공학(一公學)에서 있었고, 오후에 민단의 주최로 개최되었음을 보도하였다. 이때에도 동일한 보급용 단군영정이 참여자들에게 배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단군영정은 1917년 11월 제작 직후부터 박찬익 선생이 사망하기까지 30년 이상을 그 마음에 깊이 간직했던 것이다. 후손들이 국노(國奴)가 되지 않게 하려면, 그에게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은 유언에 짧게 언급된 “내 나라, 내 겨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렵더라도 할 수밖에 없는 무엇”이었다. 그것을 지켜주는 것은 이 한 장의 사진에 담겨있는 조선혼‘한국혼’을 아우르는 단군이었다. 이 빛바랜 한 장의 작은 영정은 아들 박영준·신순호 부부에게 전해졌다. 그들 역시 뼛속까지 그 의미를 알고 있었다.

 

김성환 경기도박물관장

 

출처 :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363364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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