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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사람을 살리는 의사에서 나라를 살리는 열사”로

by 정소슬 posted Oct 3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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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살리는 의사에서 나라를 살리는 열사”로

[시사저널]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0.29 17:37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40화 - 역사를 바꾼 식민지 의사들

 

 

[편집자 주] 역사를 살피다 보면 데자뷰처럼 반복되는 삶이나 사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제국주의의 침략부터 해방을 맞이하기까지,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나라들의 역사를 접할 때 더욱 그러하다. 100년 전 그들과 같이 아파하고 같이 분노하며 공유했던 역사를, 지금이라도 공감과 공존의 가치로 이어갈 수 없을까? ‘역사의 데자뷰’ 기획연재가 ‘그들과의’ 역사를 통해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없이 좋겠다.

이 연재의 필자인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TV유니온 대표PD)은 KBS 다큐멘터리 전문PD 출신으로 《빅토르 최》·《731부대는 살아있다》·현각스님의 《만행》 등 많은 화제작을 만들었고, 한국방송대상과 방송위원회대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 근현대사 전문 다큐 제작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항일영상역사재단을 설립하여 영상을 통한 ‘독립정신의 글로벌화’에 힘을 쏟고 있다.

 

근대화 과정에서 새롭게 등장한 직업군 가운데 의사란 직종은 그 당시에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자고나면 달라지는 역사적 격동기에 그만큼 안정된 삶을 보장받는 직업이 그리 흔치 않았을 터다. 게다가 의사들은 서양 의술을 익히면서 자연스레 근대 사상도 접하게 되어 시대적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인지 우리 근대 역사에서는 “사람을 살리는 의사에서 나라를 살리는 열사”로 나선 이들이 의외로 많다. 한인 최초의 서양 의사로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조선 첫 면허 의사로 독립군 군의관이 된 ‘백정의 아들’ 박서양, 3·1운동 때 79인의 ‘소녀결사대’를 이끈 여의사 최정숙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여기에다 ‘예비 의사’인 의학도들의 활약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세브란스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3·1운동 당시 “병원 내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첩보를 받은 일경들이 병원에 들이닥쳤다. 그러자 학생들은 누구나 가기 꺼려하는 해부실습실에 독립선언문과 등사기를 재빨리 숨겨놓았다고 한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이들의 활약은 독립선언서 배포 작전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경성의 의학도들은 ‘하숙집 모의’를 통해 각 지역 담당자를 정하고 선언서 배포를 책임졌다. 이런 의학도들의 목숨을 건 행동은 만세 물결을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한 기폭제가 되었다.   

 

1908년 조선 첫 면허를 받은 의사들이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에 몸담은 이래 1940년대 중국 의학교를 나와 광복군에 뛰어든 이들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열혈 의사들은 보장된 삶을 내던지고 구국 전선에 뛰어들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의사와 의학도 출신의 독립유공자는 80여 명에 달한다. 그 시대 어느 전문 직업군보다 많은 수치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를 다한 노블레스 오블리쥬의 표상으로 의사를 떠올리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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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과 최초의 민영신문인 독립신문. 오른쪽은 3·1운동 때 해부실 상황을 묘사한 그림

 

청진기를 버리고 혁명가 된 아시아 식민지 출신의 거물 의사들

 

이들 가운데 서재필(1864~1951)은 유일하게 1등급 훈장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인물이다. 조선조 과거에 최연소 합격한 이 ‘천재 소년’은 1884년 20살 나이에 개화파의 일원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 일로 집안 전체가 역적으로 몰려 부모·형제·아내는 목숨을 잃었고 두 살 박이 아들은 굶어 죽었으며 다른 가족들도 처형되거나 노비로 팔려갔다. 말 그대로 ‘멸문지화’를 당했던 것이다. 이런 처지에서도 그는 1893년 미국 의사 면허를 따냈고 10년 만에 귀국해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설립을 주도했다. 그러나 그의 계몽 운동은 수구파 정부의 탄압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서재필은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하며 의업을 계속했다. 한때 사업에 실패해 파산할 지경에 이르기도 했지만 그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은 만행을 은폐하고 있다. 이를 미국에 알려 독립 지지를 이끌어내야 한다”면서 조국과 인연을 이어갔다. 임시정부 수립 후에는 구미위원회의 임시위원장을 맡아 외교적 노력도 적극 펼쳤다. 하지만 일각에선 그가 “자신의 업적을 과장하고 철저하게 미국인 행세를 해왔다”라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우리 의료 역사의 상징적인 인물을 두고 이렇듯 후대의 평가가 엇갈리는 점은 가슴 아픈 일이다.

 

서재필과 같은 연배의 아시아 식민지 의사들 중에는 유독 거물 독립투사들이 많다. 아무래도 서구 열강들이 침략한 시기가 비슷한데다 의사가 근대 사상을 비교적 빨리 받아들인 지식인층이란 공통점 때문으로 여겨진다. 중국인에게 국부로 불리는 쑨원(1866~1925)은 서양 의사 면허를 딴 혁명가였다. 그는 광동정부 총통 시절 우리 임시정부를 처음으로 승인한 공로로 서재필과 같은 대한민국장에 추서되기도 했다. 필리핀에서 ‘독립의 아버지’로 추앙 받는 호세 리잘(1861~1896) 또한 근대화 계몽운동을 펼친 대의(大醫)였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리잘은 식민본국인 스페인과 독일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곳에서 식민지배를 비판하는 글과 소설을 발표해 현지 지식인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그는 1891년 마닐라에서 민족동맹을 결성하고 비폭력 독립운동을 이끌어 스페인 식민당국의 눈엣가시로 여겨졌다. 저항과 추방을 반복하던 그는 결국 무장투쟁단체를 배후 조종한 혐의로 체포되어 공개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가 남긴 ‘마지막 이별’이란 시의 “내 슬프고 억압된 목숨을 조국에 바치노라. 죽음은 곧 휴식일지니”라는 구절은 아직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리잘은 당시 흔치않은 안과학을 공부했는데 그 이유는 어머니의 시력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그의 일기에는 “어머니의 눈 치료는 성공했지만 회복 과정을 무시해 상태가 악화되었다”라며 안타까워하는 대목이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리잘이 추방지에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 준 일이 마치 예수처럼 “눈먼 자에게 시력을 회복시켜 준다”라고 알려진 사실이다. 《안과의사 - 호세 리잘》이란 책에서는 이런 소문이 리잘의 독립운동을 ‘신화’로 자리잡게 한 요인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어찌됐든 그의 사망 2년 뒤 필리핀은 스페인을 물리친 미국의 식민지배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 전쟁에 서재필이 군의관으로 참전한 것은 아시아 식민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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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리잘과 그가 어머니 눈을 시술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 오른쪽은 베트남 의사 팜 응옥 타이

 

식민지 의사 중에는 직접 총을 들고 무력항쟁에 뛰어든 이들도 있다. 베트남의 팜 응옥 타익(1909~1968)은 하노이 의과대학 졸업 후 식민본국인 프랑스에서 의사로 활동했다. 1936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병원을 차려 큰 성공을 거뒀지만 전재산을 항불투쟁에 쏟아부었다. 애초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돈을 번 셈이었다. 1945년 사이공에서 청년혁명단을 조직한 그는 “피와 눈물 없는 평화는 없다”면서 전쟁터로 향했다. 독립을 쟁취한 뒤에는 10년 동안 보건부 장관을 지내며 말라리아 퇴치에 커다란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현재 호찌민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의과대학이 세워져 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의열 투쟁을 벌인 의사로는 이태준(1883~1921)을 들 수 있다. 그는 몽골로 건너가 그곳 통치자인 복드 칸의 주치의로 일하면서 당시 만연한 성병을 퇴치하는데 크게 기여해 외국인으로서 최고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태준은 레닌이 지원한 독립자금을 상하이로 운반하거나 의열단의 폭탄제조 활동에도 가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가 몽골을 침략한 러시아 백군의 운게른 부대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일본군 참모들이 러시아군에게 그를 죽이도록 사주했다”란 주장에 힘이 실린다. 그 무렵 약 50명의 일본 관동군 참모들이 운게른 부대에서 활동한 사실이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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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준과 그의 이름을 딴 몽골 공원. 오른쪽은 동의의국 옛터(붉은 원)와 의약 거리

 

몽골의 거리 모습을 바꾼 한 조선인 의사의 처절한 삶

 

그런데 최근 국립 몽골대의 어이더브 교수는 “그 당시 수도 울란바토르에는 일본 밀정들이 많아 독립활동을 드러낼 수 없었다”면서 ‘의약품 부족 때문에 벌어진 참극’이란 또 다른 분석을 내놓았다. 러시아군이 의약품을 강탈하기 위해 이태준을 죽였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그는 “이태준이 운영한 동의의국의 처방이 워낙 신비로워서 그의 자취가 아직도 살아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실제로 동의의국이 있던 오르트자강 거리에는 무려 40개 남짓한 병원과 약국이 들어서 있다. 그의 병원에 환자들이 모여들면서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의료타운을 이루게 된 것이다. 역사는 때로 이처럼 신기한 풍경을 연출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병을 다스려서 몸을 바로잡는 것과 사회적 갈등을 다스려서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은 그 맥을 같이 한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사는 좌절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직업이다. 시위 함성으로 날이 새고 지는 요즘 우리 현실에서 의사와 같은 사회 지도층의 역할이 더욱 그리워진다. 100년 전 이 땅의 의사들이 ‘병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청진기를 내려놓은 상황이 지금이라고 달라졌겠는가.

 

출처 : http://www.sisajourna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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