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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파동과 월북과학자들

by 정소슬 posted Oct 29,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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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8. '국대안' 파동과 월북과학자들

[이로운넷] 김우재 박사 | 승인 2019.10.29 02:25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의 한계...초대 총장마저 미국인

"친일교육엘리트에 한국 교육 미래 맡길 수 없다" 반발

미군정 주도 '반공'으로 시작한 한국현대교육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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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대안반대는 통일지향적 교육운동이자 민족자주 교육운동이었으며 학원민주화 운동이었다. 그러나 국대안이 강행되며 생겨난 서울대학교는 한동안 보수적 교수들의 아성이라고 비판받기도 했다.” 이희수 <미군정기 최대의 교육운동, 국대안 반대운동>중에서


“국대안 반대 운동의 중심 세력을 이룬 유능한 제대 출신 서울대 교수들은 북으로 가 김대에서 창설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각자 분야에서 “독보적 존재”였고 또 학생들로부터 “수재”로 알려진 교수들이다.” 김기석 <해방 후 분단국가 교육체제형성 1945-1948> 중에서

 

식민지의 단절, 새로운 학문지형의 탄생

 

한국 학계는 식민지라는 단절의 시기를 품고 산다. 일제 식민지 36년을 전후로, 나라는 조선에서 대한제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변했고, 학문은 유학을 거쳐 각종 사회과학과 자연과학 공학 및 서양의학과 법학 등으로 변모했다. 그 신학문은 대부분 일본과 중국 및 서양을 통해 들어왔고, 해방이 되자 이미 한반도의 학문지형은 조선의 흔적을 찾을 수도 없을만큼 변해있었다. 과거제로 유지되던 조선의 성리학 체제는, 식민지를 거치며 매우 빠른 속도로 근대화됐고, 한자라는 언어로만 행해지던 학문의 소통은 국한문 혼용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의 인문학 위주의 학문체제는 식민지의 단절을 거치면서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학자들은 여전히 한문에 익숙했고, 동양학이 대세는 아니었으나 읽고 쓰는 필로로기를 중심으로 하는 인문사회과학의 모습은 중국학문이 아니라 서양학문으로 그 대상만 바꾸어 존속됐다. 동양철학이 서양철학으로 전공만 바뀐채, 인문학이 학문의 전당에서 중심이 되는 모습은 변하지 않은 셈이다.

 

오히려 이 땅에 새롭게 등장한 학문은 자연과학이었다. 인문학자들에겐 그나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전통부터 식민지 시절 신채호 같은 학문적 선배들의 역사가 존재했지만, 과학기술인에겐 아무런 역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해방공간에서 처음으로 이 땅에 과학기술의 토양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했고, 대부분 일본이나 미국 등을 통해 서양과학을 배운 유학파였다. 식민지 시절, 교육의 주권은 일제에 있었지만, 그 통제 하에서도 민족학교를 만들려는 노력은 병행됐고, 한반도에도 이공계열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이 꽤 많이 건립됐다. 가장 유명한 대학은 경성제국대학으로 법문학부와 의학부 그리고 이공학부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치의학전문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수원고등농업학교 등의 전문학교들이 과학기술과 관련된 학문을 가르치는 대학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한국 학문의 첫 단추, 국대안 반대운동

 

해방 후에도 한반도는 미군정 통치를 받아야했다. 도올의 말처럼, '미군정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다.' 해방 다음 해인 1946년이 되자 미군정청 문교부는 경성대학과 8개 관공립 전문학교 및 1개 사립 전문학교를 일괄 통합하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약칭 국대안)’을 일방적으로 발표한다. 국대안을 주도한 이는 미군정 문교부 차장이었던 오천석이라는 인물로, 미국 코넬대학교와 노스웨스턴 대학교를 거쳐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학자였다. 미국 유학파였던 오천석은,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한 후 빠르게 움직여 미군정과 긴밀하게 소통한다. 그는 미군정의 교육담당 대위와 함께 조선총독부 산하의 학무국을 접수했고, 이후 남쪽의 교육계를 장악하게 된다.

 

오천석은 박사학위를 '민족 동화 수단으로서의 교육 : 한국에 대한 일본의 교육 정책 연구'로 받았을만큼 뛰어난 교육정책가였다. 그가 국대안을 구상한 이유는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경성대학 의학부와 경성 의학전문학교가 나뉘어져 여러 측면에서 낭비를 초래한다는 이유다. 둘째, 고급 기술 인력의 부족을 매우기 위해 흩어진 고등교육기관을 통합해 종합대학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다. 셋째, 일제시대부터 존속회던 배타적 파벌주의와 연고주의가 학문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이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천석은 일본의 도쿄대학, 독일의 베를린 대학, 프랑스의 파리대학, 중국의 베이징 대학 같은 한국을 대표할 종합대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천석에 의해 기안되고 미군정에 의해 발표된 국대안은 엄청난 학계의 반대에 부딛혀 걷잡을 수 없는 반대운동으로 퍼져나갔다.

 

해방공간은 좌익과 우익의 이념대결이 격렬하게 진행중이었고, 국대안 반대운동은 좌익 학생들이 주도해나갔다. 미군정이 국대안을 통해 실현하려던 교육정책의 핵심은, 해방공간 미소가 냉전을 향해 달려가던 국제정치질서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당시 미국은 한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한반도를 대소 반공기지로 안착시켜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 세계 경제 질서 속에 동아시아를 편입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의 교육정책은 이러한 미국의 국익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중요한 사안이었던 셈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미국은 해방공간에서 좌익 세력의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탄압했고, 한국인들에 대한 교육기회의 확대와 교육의 질적 수준 향상보다는 소련과의 이념 전쟁을 위해 교육을 도구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보였다. 일제 교육 잔재를 청산하고, 자주적인 통일 정부의 수립에 필요한 민족민주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결과 미군정은 교육 주도세력을 대부분 우익 인사들에서 선발했고, 바로 이런 미군정의 일방적 국대안 강행이 좌익을 중심으로 한 반발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오천석은 듀이의 철학을 이어받아 주입식 교육에 혁신을 담아 거기에 ‘새교육’이라는 이름을 붙혔지만, 반봉건주의, 반식민주의, 반공산주의을 내세우던 그의 교육철학이 미군정 시기 교육현장에 적용될 땐, 반공 이데올로기만 부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게다가 미군정기의 교육주도세력은 오천석, 백낙준, 현상윤 등의 미국유학파 출신 엘리트들이 주도했고, 관서 출신의 기독교인과 반공주의자, 지주 이상의 출신 성분, 보수 정치세력, 흥사단원, 친일부역 혐의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친미세력으로 이루어진 교육엘리트들은 기독교, 반공, 보수 우익의 색깔로 미군정과 공조하며 국대안을 한국 교육의 혁신으로 포장해나갔다.

 

국대안 반대 운동의 좌절과 학문의 분열

 

1946년 7월 13일 발표된 국대안은 누구도 반기지 않는 미군정의 독단적 결정이었다. <조선인민보>가 반대입장을 내보이고, 교수집단이 반발하면서 민주주의 민족전선, 문화단체 총연맹, 과학자 동맹, 조선 교육자협회 등의 지식인 집단이 반대 성명을 내기 시작했다. 방학중이었지만 학생들도 연이어 성명서를 내기 시작했고, 이어 결성된 국대안 반대 공동투쟁위원회에는 서울대학교로 재편될 각 단과대학 교수 대부분과 서울대생의 90% 이상이 참여했다. 하지만 미군정은 이를 묵살하고 법령을 공표 강행했고, 이후 국대안 반대운동은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학교수와 학생들의 격렬한 저항, 그리고 등록거부 및 동맹휴업 등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국대안은 해방공간의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않고 졸속으로 만들어진 미군정의 고집이었고, 당시 식민지를 거쳐 한국에서 새로운 학문의 꿈을 꾸던 이들에게는 관료주의적 행정이 한국 교육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였다.

 

미군정은 서울대 문리대, 법대, 상대 등을 휴교조치하고 학생 전체에게 정학 처분을 내린다. 1947년 3월이 되면 서울대 8,040명 중 4,956명이 제명된다. 국대안은 당시 해방공간의 학자들의 꿈을 짖밟는 미군정의 군화발과 같았다. 당시 서울대 물리학자였던 한인석은 국대안이 대학의 자치적인 운영을 부정하고 비민주적이며 관료주의적 행정이라고 비판하며, 오천석을 위시로 하는 친일파 교육엘리트들에게 한국 교육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고 천명한다. 게다가 미군정은 첫 서울대 총장으로 미국인을 임명함으로써, 미국의 국익을 빼곤 한국 교육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소련과의 국제정치적 이념대결에 골몰하던 미군정에게, 한국 고등교육의 미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군인에게 고등교육의 기틀을 만들게 한 미군정의 생각은, 해방공간의 지식인 모두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후 국대안 반대세력은 서북청년단과 문교부 및 경찰당국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탄압을 받게 된다. 빨갱이 색출이라는 반공주의의 공포가 남한을 지배하던 그 시기에, 진보적 민족주의 학자들은 어쩔 수 없이 월북의 길을 택하게 된다. 한글학자 이극로, 이만규, 정열모가 월북했고, 의열단 단장이던 김원봉도 월북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김일성대학의 설립 소식이 알려지면서 수 많은 지식인이 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 대부분이 과학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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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eroun.net/news/articleView.html?idxno=8305

 


 

[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7. 해방공간의 진보적 과학지식인이 남긴 숙제

[이로운넷] 김우재 박사 | 승인 2019.09.24 01:05

 

"기초 과학기술이 없는 국가의 운명...좌우이념 떠나 사회를 보호하는 이데올로기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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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시대'와 '현대과학'의 표지./사진=한겨레

 

“조선 사람에게 무엇보다 먼저 과학을 주어야 하겠어요” 이광수, <무정> 중 개화론자 형식의 대사

 

“자연과학은 철학, 예술과 같이 일정한 사회조직 즉 생산관계의 토대 위에 서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여경구, 1946년 <인민과학> 창간호에 실린 글 중에서

 

 

해방 공간과 과학기술단체의 난립, 이념을 마주한 과학기술인

 

20세기는 이념의 전장이었다. 식민지 조선은 여러 이념들이 얽혀 갈등하고 반목하며 부딪히는 용광로였다. 독립운동 또한 3.1운동 이후 민족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의 여러 이념으로 나뉘어 전개됐다. 식민지 시대, 일제는 조선인 과학기술인의 양성에 힘을 쏟지 않았다. 식민지 시대를 통털어, 과학기술을 대학교 수준 이상으로 공부한 조선인은 400여명 뿐이다. 이들 대부분이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나 미국 등에서 유학한 사람들이었다. 이공계 박사는 10여명 뿐이었다. 해방 당시 이런 인재들을 모두 통틀어, 과학기술인력은 약 2000 여명, 식민지였던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기에 턱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해방이 되자, 식민지에서 억압받던 과학기술인들도 다른 민족단체들처럼 생기있게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해방 직후 주요 기관들에는 자치위원회가 생겼는데, 이때 과학기술계에도 조선기술연맹, 조선학술원 등의 단체들이 설립된다. 이 중 가장 먼저 생겨난 과학기술 관련 단체는 조선학술원이다. 조선학술원은 학술계의 모든 부문을 포괄한 단체로, 과학기술 부서로는 이학부, 공학부, 농림학부, 기술총본부 등을 갖추고 있었다.

 

조선 학술원의 목표 제 1항은 다음과 같았다. “본원은 과학의 모든 부문에 걸쳐서 진리를 탐구하며 기술을 연마하야 자유 조선의 신문화 건설을 위한 연총(모든 것이 샘솟는 연못)이 되며 나아가서 국가의 요청에 대한 학술 동원의 중축이 되기를 목적으로 함.” 조선학술원은 해방 바로 다음날 과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적 포부와 사회의 변화를 목적으로 설립됐다.

 

공학자들은 조선공업기술연맹을 결성했다. 조선공업기술연맹에는 국가의 공업발전을 돕기 위한 기술자 양성과 배치를 목적으로, 광산부, 야금부, 전기부, 연료부, 통신부, 건축부, 기계부, 섬유부, 화학부, 요업부, 식품부, 공예부 등으로 구분됐다. 당시의 기술 수준을 고려하면 대부분의 분야를 총망라하는 구성을 지닌 대단한 조직이었다. 과학자와 공학자가 함께 조선과학기술연맹도 비슷한 시기에 결성됐다. 이 단체는 “과학기술자의 총역량을 결집해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과학기술자들을 적정 배치하며, 산업과 생활의 향상을 꾀하고 아울러 과학기술자가 진보적 소양을 갖추는데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1946년에는 조선과학기술협회도 설립됐다. 해방이 되자, 과학기술자들은 마치 기다렸다는듯이 자발적으로 과학기술단체들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해방 공간은 격동기의 정치적 상황에 직면해 있었고, 다양한 정당과 정치세력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고 있었다. 과학기술 단체들은 다양한 이념이 난무하는 정치단체들로부터 매번 지지를 요구받거나 동참을 강요받았다. 해방정국의 과학기술자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거나 소극적이었지만, 시대는 과학기술자들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과학기술단체들은 그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과 지향을 표현했고, 이는 당시 창간된 여러 기관지와 과학잡지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사회적 발언에 소극적이지 않았다. 1947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전국과학자대회에서 사회과학연구소, 조선과학자동맹, 조선경제연구소 등이 발전적 해체를 선언하고 ‘과학동맹’을 결성하기도 한다. 당시 일본을 비롯한 해외의 과학기술자들도 <과학과 기술>등의 잡지를 창간하고 새롭게 태어난 조국에서 해외과학기술인의 역할을 주장했다.

 

해방 공간 과학기술을 위한 세 가지 이념 - 민중, 국가, 그리고 건설

 

해방 공간은 혼란스러웠고, 과학기술자들은 사회의 요구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학기술자들이 과학기술에 대해 보여준 이념적 스펙트럼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첫째, 과학기술 연구는 상아탑에 안주하거나 이윤 추구의 수단이 돼서는 안되며, 철저히 공익에 봉사하며 민중의 실생활과 연결돼야 한다는 흐름이다. 이들에게 과학기술은 민중의 실생활과 분리돼서는 안되는 학문이었다. 둘째, 과학기술자들의 정치적 참여를 비판하면서 과학기술자들은 이념에 편향되지 않고 국가의 발전을 위한 연구에 몰두해야 한다는 흐름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국가의 발전이었다. 셋째, 과학기술 자체의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는 흐름이다. 사실 대부분의 과학기술자들은 민중도 국가도 상관 없이,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이 길을 갔다. 이들은 식민지 조선에 존재하지 않았던 과학기술의 기반을 먼저 건설해야 민중도 국가도 찾을 수 있다는 상식적인 주장을 하던 대부분의 과학기술자의 목소리를 대변한다. 이런 목소리들은 당시 출판된 주요 과학 잡지와 단체의 기관지들에 실려 있는데, 당시 널리 읽힌 주요 과학 잡지로는 <대중 과학>, <현대 과학>, <과학 세기>, <과학 나라>, <과학과 발명>, <인민과학> 등이 있다.

 

해방이후 조적된 다양한 과학기술단체들은 이념과 정치적 성향에서 서로 다른 지향점과 넓은 스펙트럼을 지니고 있었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과학기술의 역할에 대해서만큼은 일치된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과학기술은 새로운 조국에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었고, 새로운 세계를 위한 해방구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지식인이었다. 김동광은 그의 논문 <해방 공간과 과학자 사회의 이념적 모색>에서, 당시 과학기술자들의 활동이 지닌 함의를 몇 가지로 구분해 설명한다.

 

첫째, 당시 난립했던 과학기술인단체들은 비록 혼란스러운 형태로 존재했지만, 식민지 시기 억압된 과학기술자들의 의지가 자발적으로 폭발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회참여라고 해석돼야 한다. 특히 당시 가장 적극적이고 활발했던 단체의 과학기술자들은 이념적 성향이 강한 지도자들에 의해 이끌어졌으며, 이는 해방정국에서 과학기술자들이 결코 정치적으로 소극적이거나 중립적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둘째, 해방 공간의 과학기술인 운동은 지식인 운동의 중요한 일부였다. 당시 과학기술자들은 신탁통치, 단정 수립 등의 민족적 의제에서 적극적인 의견을 개진했으며, 이는 과학기술자들이 조선학술원, 조선문화단체총동맹, 민전, 과학동맹 등의 진보적이고 정치적인 지식인들의 연합전선 속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학기술자들은 이러한 단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으며, 여러 의제에서 이들의 역할은 필수적이었다. 과학기술은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학문이었고, 새로운 국가의 새로운 이념이 될 자격까지 갖추고 있었다. 바로 그런 역사적 공간에서, 과학기술자들은 상아탑에 머물지 않고 사회와 함께 움직인 지식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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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과학' 창간호./사진=한겨레

 

해방 공간의 진보적 과학기술인, 왜 그들은 좌파였을까

 

문재인 정부 들어 이제서야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재조명을 받고 있다. 대부분 좌파이자 강한 진보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던 해방 공간의 과학기술자들 또한 재조명을 받을 필요가 있다. 미군정이 시작되기 전까지, 해방이후 한반도를 지배하던 가장 강력한 이념은 사회주의였다. 당시 과학기술자들도 어쩔 수 없이 소련과학아카데미 등에 강하게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들 모두 첫째,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신생 조국 건설에 이바지하고, 둘째, 대중들에게 과학을 교육해 반과학주의와 비과학적 태도를 척결하도록 계몽하고, 셋째,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을 공통의 주장으로 삼고 있었다.

 

이들은 진보적이었고 대부분 좌파에 가까운 정치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식민지에서 일본의 통치를 받았던 과학기술인의 정치적 성향이 진보적 색채였던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신생 조국에서 과학기술이 발전해야 한다는 당위에 머물지 않았고, 해방된 조국의 과학이 식민지의 과학과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새로운 과학에 대한 지향점은 와세다 대학 출신으로 월북후 흥남공업대학 교수 및 흥남연구소장을 역임했던 여경구가 <인민과학>의 창간호에 쓴 “과학기술의 진로”라는 글에 담겨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과학은 철학, 예술과 같이 일정한 사회조직 즉 생산관계의 토대 위에 서 있는 이데올로기이다. 이데올로기로서의 자연과학의 기원이 인간의 일상생활에 불가결한 생활수단의 탐구에 있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인민과 분리되고 이데올로기와 분리되어서는 과학은 존립할 수 없다. 따라서 과학자는 그 학문연구를 첫째, 대중과의 관계에 있어서, 둘째로 이데올로기와의 관계에 있어서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진보시킬 필요를 통감해야 한다.. 우리는 대중의 물질적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일하고 있다. 우리는 일하는 인간을 계산단위로 여기고 기계적 조직의 부속물로 취급하는 자본주의의 기계문명과 같은 혼빠진 문명을 건설할 생각이 전혀 없다.”

 

여경구의 새로운 과학에 대한 설명은 명쾌하다. "해방 공간의 새로운 과학은 대중 혹은 인민과 유리돼 존재할 수 없으며, 오히려 대중과 인민의 힘으로 지지돼야 한다. 또한 자연과학은 다른 이데올로기와 분리돼 존재할 수 없고, 따라서 사회로부터 고립돼 존재할 수도 없다." 여경구는 이미 20세기 중반, 과학이 왜 사회에 스며들어 사회와 함께 존재하며, 또한 사회를 보호하는 이데올로기가 돼야 하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2019년 한국의 과학기술은 분명 양적∙질적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전쟁을 겪고 또 군사독재라는 비극을 경험하면서, 사회 속에서 당당하게 과학의 사회적 의미와 실천을 강조하던 선배 과학기술자들의 경험과 사상은 희미해졌다. 어쩌면 오늘날의 한국 과학기술인들은 해방 공간의 과학기술인 선배들보다 정치적으로 나약하고, 이념적으로 무능하며, 함께 사회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 싸울 수 있는 연대조차 지니고 있지 못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과학은 한걸음 퇴보했는지 모른다.

 

해방 공간에서 화학공학자로 그리고 이후 기술관료로 한국 공업정책에 기여해서 한국 과학기술인 전당 16인 중 한 사람으로 올라 있기도 한 안동혁은, A.D.H라는 이름으로 <과학시대>, <현대과학>, <과학과 발명> 등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그는 한국 과학대중화의 선구자로 불리기도 하는데, 지금처럼 사회를 바꾸는 일과 괴리된 과학대중화 집단과는 다른 현장에서 성장해 사회 혁신을 꿈꾼 과학기술자였다. 그는 <현대과학>의 창간 축사에 이런 말을 남겼다.

 

“과학기술의 기초가 없는 경제는 외국에 빌붙어 사리만 챙기는 매판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할 것이며, 이는 실질상 식민지의 범주내에서 신음함을 의미한다.”

 

북으로 간 과학자 여경구도, 남에 머물렀던 과학자 안동혁도, 과학기술을 사회적 관점에서 사고하고 그런 과학기술을 위해 실천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일본의 무역제재로 시끄러운 지금, 한국사회의 과학기술인과 구성원 모두가 곰곰히 생각해봐야 하는 문장이다. 우리는 어떻게 한국의 과학을 새롭게 혁신시킬 수 있는가. 그 대답은 사회를 움직이는 이념, 그리고 그 이념을 마주할 때 더욱 진보적으로 변화하는 과학에서 찾아야 한다.

 

주) 이 글을 작성하기 위해 다음 논문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김동광. (2006). 해방 공간과 과학자 사회의 이념적 모색. 과학기술학연구, 6(1), 89-118.”

 

출처 : http://www.eroun.net/news/articleView.html?idxno=7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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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과 함께하는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식 친일매국노 안익태 애국가 제창 대구사람 이육사(1920년.17세-1937년.34세) 의열단 핵심 단원. 대구교도소 264수번 대구광역시 이육사기념관 건립에 힘써야 [뉴스프리존] 문해청 기자 | 승인 2019.11.12 08:28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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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11
    Nov 2019
    23:42

    김원봉 고향 밀양서 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식

    김원봉 고향 밀양서 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식 [세계일보] 입력 : 2019-11-11 09:31:28 /수정 : 2019-11-11 09:31:28 10일 오후 경남 밀양시 아리랑아트센터에서 열린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 의열단 창단 100주년 기념식에서 김경수 지사(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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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08
    Nov 2019
    11:19

    “이념 논리에 매몰돼 약산(김원봉의 호)을 모독 말라”

    “이념 논리에 매몰돼 약산(김원봉의 호)을 모독 말라” 항일투쟁 김원봉 의열단장 처조카 박의영 목사 인터뷰 [국제신문] 김미희 기자 maha@kookje.co.kr | 입력 : 2019-11-07 19:47:38 - 독립운동사 핵심 인물인데도 - 월북 이유로 공적 안알려지고 - 서훈 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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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06
    Nov 2019
    12:41

    소설가 이원규, 의열단 100주년 ‘민족혁명가 김원봉’ 출간

    한길사, 의열단 100주년 ‘민족혁명가 김원봉’ 출간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 승인 2019.11.06 11:08 소설가 이원규, 2006년 ‘김원봉 평전’ 전면개정증보판 펴내 [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 소설가 이원규 선생이 ‘약산 김원봉 평전’ 전면 개정 증보판을 펴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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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06
    Nov 2019
    12:33

    남양주 거부 이석영, 청산리대첩 산실 만든 무장독립운동 큰 별

    남양주 거부 이석영, 청산리대첩 산실 만든 무장독립운동 큰 별 [아주경제] 황호택 논설고문 · 서울시립대 교수 | 입력 : 2019-11-05 18:41 “학교는 산속에 있었는데 열여덟 개의 교실이 산허리를 따라서 줄지어 있었다. 열여덟부터 서른살까지 100명 가까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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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04
    Nov 2019
    08:37

    [의열단100주년]⑮김원봉, 남북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의열단100주년]⑮김원봉, 남북 어디서도 환영 받지 못한 비운의 독립운동가 [뉴시스] 등록 2019-11-03 13:29:54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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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30
    Oct 2019
    14:29

    “사람을 살리는 의사에서 나라를 살리는 열사”로

    “사람을 살리는 의사에서 나라를 살리는 열사”로 [시사저널] 이원혁 항일영상역사재단 이사장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10.29 17:37 [이원혁의 ‘역사의 데자뷰’] 40화 - 역사를 바꾼 식민지 의사들 [편집자 주] 역사를 살피다 보면 데자뷰처럼 반복...
    By정소슬 Reply0 Views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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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9
    Oct 2019
    11:17

    '국대안(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 파동과 월북과학자들

    [김우재의 과학적 사회] 8. '국대안' 파동과 월북과학자들 [이로운넷] 김우재 박사 | 승인 2019.10.29 02:25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의 한계...초대 총장마저 미국인 "친일교육엘리트에 한국 교육 미래 맡길 수 없다" 반발 미군정 주도 '반공'으로 시작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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