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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의열단100주년]⑬불꽃같은 삶 김산…비운의 '아리랑'

by 정소슬 posted Oct 20,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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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100주년]⑬불꽃같은 삶 김산…비운의 '아리랑'

[뉴시스] 등록 2019-10-20 14:39:34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재조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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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김산(金山, 1905~1938). (사진=의열단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산(金山, 1905~1938)은 비록 조국 땅과 멀었지만, 독립의 염원을 불태우며 이역만리 중국에서 온몸을 바친 인물이다.

 

1919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은 3·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김산은 세계열강으로부터 버림받은 조국을 원망하며 새로운 사상을 찾아 국경을 넘는다.

 

그의 목적지는 식민지 해방을 지원한다는 소련이었지만 당초 계획을 접고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상하이로 향한다.

 

1920년대 '동양 속 유럽'으로 불리던 상하이는 다양한 사상 논쟁이 펼쳐지던 곳이었다. 김산은 이곳에서 이동휘, 안창호 등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를 만나게 된다.

 

비슷한 시기 김산은 대담한 무력투쟁으로 일본에 맞서던 의열단의 활약을 접하게 된다. 아직 어렸던 김산의 눈에 언제나 죽음 앞에 서 있는 의열단원들의 생활은 낭만적이었다.

 

의열단장이었던 김원봉, 단원 오성륜 등과 교류하면서 차츰 무정부주의로 기울어진다. 당시 김산에게 의열단의 무력 투쟁이 조국 독립의 한 돌파구로 보였다. 그러나 곧 의열활동의 한계를 깨닫는다.

 

1921년 베이징으로 간 김산은 안창호의 주선으로 베이징 향산 자유원에 잠시 머무른다. 이듬해 김산은 민족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의학을 공부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해 베이징 협화의학원에 입학하게 된다.

 

김산은 이곳에서 당시 대학생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지던 마르크스주의에 빠지게 되고 1923년 공산주의 계열 모임인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한다.

 

이 시기 김산은 북경에서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인물을 만난다. 바로 운암 김성숙이었다.

 

승려 출신인 김성숙은 의열단의 이론가로 활동하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까지 지내고 좌우 통합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항일독립지사다. 해방 후 귀국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는 혁신 정당을 이끌기도 한다.

 

한편 중국은 신해혁명 이후 국민당 당수이자 지도자로 떠오른 쑨원(孫文)이 북방의 군벌세력을 정벌하고 국가를 통일하기 위해 1924년 1월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는다.

 

국공합작 직후인 1924년 6월 쑨원은 광저우(廣州) 교외에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한다. 중국 전역에서 청년들이 몰려들었고, 김산은 오성륜과 함께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의열단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황포군교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1925년 3월 쑨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국 국민당은 장제스(蔣介石 )의 지도하에 들어가고, 얼마 후 장제스는 북벌계획을 실행에 옮기지만 김산은 북벌에 참여하지 않았다.

 

1926년 광주에 있는 중산대학에서 의대 본과 2학년에 다녔던 김산은 다음해 전공을 정치학으로 바꾼다. 김산은 대학을 다니며 '유월한국혁명청년회'라는 단체에도 가담해 선전부장직을 맡기도 한다.

 

이 무렵 국공합작의 분열 조짐이 나타난다. 결국 분열 조짐은 1927년 장개석 군대가 노동자와 공산당원을 대대적으로 숙청 및 학살하는 상하이 쿠데타로 이어지고 1차 국공합작이 끝이 난다.

 

이 사건은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광저우에 모여든 조선인들에게 충격이었다. 하지만 김산은 조선의 해방을 위해 중국혁명을 지원하기로 한다.

 

1927년 12월 11일 새벽 광저우 모여 있던 진보적 인사와 학생들이 장개석의 쿠데타와 국민당의 공산주의자 학살에 항의해 시내를 점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른바 '광저우 코뮌'의 시작이었다.

 

당시 중산대학에 다니던 김산도 광저우 시내에서 벌어진 시가지 전투에 참가한다. 3일 동안 접전 끝에 광저우 코뮌은 진압됐고, 그 과정에서 무려 7000명 이상이 학살됐다. 여기에는 200명 남짓한 조선인도 포함됐다.

 

천신만고 끝에 광저우를 빠져나온 김산은 살 길을 찾아 광둥성의 작은 마을 하이루펑(海陸豊)으로 향한다. 이곳에서 김산은 의열단원 오성륜과 함께 당학교(黨學校)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러나 1928년 2월 하이루펑마저 국민당에게 점령당하면서 김산은 베이징으로 되돌아간다.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는 다른 길을 택한 것이다.

 

1929년 봄 김산은 베이징시 중국공산당위원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한다. 김산은 이 기간에 당의 지령으로 만주 등지에 파견돼 '조선청년동맹' 활동과 함께 중국 공산당의 지하 활동에 힘을 쏟는다.

 

베이징에서 김산은 안창호 등과 교류하던 기독교계 민족주의자 김기창의 집에 자주 들렀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 간부로 활동하고 있던 김산에게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다. 이른바 '북평(북경)살인사건'이다.

 

베이징에 있는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계열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인데, 신문들은 김산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김산은 대담하게 신문사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편지를 보낸다.  

 

김산은 이 사건으로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고 만다. 이로 인해 당시 천안문 인근에 살던 그는 언제나 자신을 옥죄어 오는 국민당 경찰의 감시 속에서 놓이게 된다.

 

1930년 김산은 동포들 사이에 이념적 반목, 국민당 경찰 감시 속에서 저작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다 같은 해 11월 21일 천안문 인근의 한 골목길에서 국민당 경찰과 맞닥뜨렸고 결국 체포된다.

 

국민당 경찰에 붙들린 김산은 일본의 식민지 백성이라는 이유로 일본에 인도된다. 이어 조국으로 압송됐고 지독한 고문을 받아야만 했다.

 

김산은 공산당원 혐의에 대한 증거가 불충분해 풀려났지만, 이후 주변의 의심과 함께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제명된다.

 

그 무렵 중국 도처에서는 체포되는 공산당원이 늘어났고 동시에 변절자도 늘었다. 김산은 고문 후유증으로 앓게 된 병마와 싸우며 당원 복귀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잠시 교편을 잡기도 한다.

 

화북에서 교편을 잡던 중 김산은 당으로부터 무장봉기를 일으키라는 명령을 하달 받는다. 그를 비롯한 대부분의 당원들이 반대했지만 봉기는 강행됐다. 김산의 우려대로 무장봉기는 실패했고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됐다.

 

수많은 젊은이들의 희생을 지켜보던 김산은 당 지도부의 관료주의적 사고방식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김산은 다시 베이징에 돌아왔지만 1933년 4월 26일 새벽 그의 집을 급습한 국민당 경찰에 의해 또다시 체포되고 만다. 전향을 강요당했지만 거부했고 이번에도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된다.

 

이듬해 1월 여성 동지 조아평과 결혼한다. 그해 가을, 아내와 함께 허베이성(河北省) 스좌장(石家庄)으로 이사했다. 그는 이곳에서 우한평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며 철거노동자 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고 노동자 조직을 구축하는 데 힘쓴다.

 

1935년 김산은 스좌장에서 활동 중 아내를 남겨둔 채 상하이로 향한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는 혁명가들과 새로운 접촉을 시도한다.

 

이 무렵부터 김산은 중국 공산당과 분리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혁명에 의지한 조선독립의 불확실성을 인식한 것이다. 오랜 세월 중국 혁명에 힘써왔던 그로서는 적지 않은 변화였다.

 

그곳에서 김산은 김성숙, 박건웅 등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고 중국 공산당과는 별개로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좌·우익의 합작체인 '조선민족연합전선' 조직에 착수한다.

 

1936년 4월 김산은 옌안으로 이동한다. 김산은 옌안 항일군정대학에서 일본 경제 및 물리학을 가르치는 강사 생활을 한다.

 

이때 미국 언론인 님 웨일스를 만나 자신의 생애를 구술한다. 웨일스는 1941년 이를 '아리랑의 노래'라는 책으로 엮어낸다.

 

그 무렵, 옌안에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의 바람이 일고 있었다. 당시 트로츠키주의자라는 호칭은 사실상 스파이라는 뜻에 가까웠다.

 

옌안에서 이같은 움직임은 소련의 스탈린이 만들어 낸 숙청 이론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었다.

 

김산은 1938년 10월 몸담았던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반혁명 혐의를 선고받고 비밀리에 처형당하게 된다.

 

옌안의 강변에서 그 무렵 아내에게 보냈다는 편지 한 구절로 당시 김산의 심경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지금 연하의 강변에 서 있소. 눈물이 연하의 모래밭을 적시고 있소. 연안을 떠나 전선으로 갈 생각이오. 아이가 크면 백의민족을 위해 분투하는 인간으로 길러주오."

 

죽음에 대한 추측만 난무한 가운데, 1978년에야 아들 고영광(계부 성을 따 고씨)이 중국공산당에 명예 회복 조사 요청을 했다.

 

중국공산당중앙조직부는 1983년 '김산의 처형은 특수한 역사상황 아래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였다'고 발표해 사후 명예를 회복했다.

 

ksj87@newsis.com

 

출처 :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91020_0000803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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