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도설] 그라운드 제로
[국제신문]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 | 입력 : 2020-06-17 19:29:43 | 본지 18면
남북관계가 나빠지니, 좋았던 시절의 추억이 꿈결처럼 아련해진다. 잠시 그 시절로 가 보자. “(2000년 6월 13~15일)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6월 말에는 현대 정주영 명예회장 일행이 원산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경협사업 문제를 협의했다. 김 위원장은 산업공단 건설 후보지로 우리가 원했던 해주지역이 아니라 개성지역을 지정하는 용단을 내렸다. 김 위원장은 ‘개성이 6·25전쟁 전에는 원래 남측 땅이었으니 남측에 돌려주는 셈 치고, 북측은 나름대로 외화벌이를 하면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김대중 정부에서 대북특사로 휴전선을 넘나들며 남북교류의 물꼬를 튼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나오는 이야기다.
김 위원장의 언행은 2000년 8월 남한 언론사 사장단이 방북했을 땐 더 호기로웠다. “남북 직항로를 열겠다” “경의선 연결 기공식 날짜를 정하겠다” “로켓 발사를 중지한다” “미국이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면 즉각 수교하겠다” 등등. 한반도 탈냉전에 디딤돌을 놓을 만한 발언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해 8월 15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열린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감동의 극치였다. 가슴 부풀었던 나날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2018년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공동선언 발표 후 평양 시민들 앞에서 했던 남북 평화공존 연설은 또 어떤가. 그 이튿날 백두산 천지에 오른 문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남한을 방문해 한라산에 함께 오르자고 제의했을 땐 남북통일이 성큼 다가오는 듯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북한의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로 한반도의 역사가 20년 전으로 퇴보해 버렸다. 그 세월이 남긴 추억들은 이제 현실감을 잃은 채 전설로 굳어져 간다. 화해의 상징 남북연락사무소는, 1945년 원폭이 투하된 일본 히로시마·나가사키나 2001년 비행기 테러로 잿더미가 된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처럼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로 변했다.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원칙을 마련한 1972년 7·4공동성명 채택 이후 남북관계는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산 정상에 바위를 밀어 올리면 떨어뜨려 다시 밀어 올리게 하는, 신의 저주에 빠진 그리스신화의 시시포스가 된 느낌이다. 그래도 ‘탈냉전의 바위 밀어 올리기’를 멈출 수는 없다. 작가 알베르 카뮈처럼 결코 좌절하지 않고 “정상을 향한 투쟁 정신으로 충만한 시시포스”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올림푸스의 신과 같은 강대국들이 만든, 냉전이란 부조리한 현실과 싸워야 한다. 그게 우리의 운명이다.
이경식 논설위원 yisg@kookje.co.kr
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200618.22018006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