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대길

by 정소슬 posted Apr 1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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立春大吉

 

 

 

그날이 입춘이었던가?
저녁나절 전화가 왔다.


"행님, 소주 한잔 어떤교?"


술자리 거절 못하는 난 당연히 "그러자!"고 했고, 그날 소위 무거동 주당들 다 모였다.
나, 윤창영(시인), 이제향(시인), 이상열(화백,시인), 윤 시인이 부른 자기 학원의 조희산(강사)에다 그 짝, 그리고 이 시인이 부른 임윤(시인), K모(존함을 들었는데 모르겠음) 시인까지 자리가 꽉 찼다.


그 자리서 이 화백이 "다른 드릴 건 없고......"하며 건낸 「立春大吉」, 「建陽多慶」을 받아 들고 와 다음 날 아침 대문에다 턱하니 붙였다.
이를 본 마누라, 대뜸 하는 말이 "노인스럽게 뭘 그런 걸 붙여요!"였다.


우리 아래층에 환갑 넘기신 형님네 대문에 붙여져 있던 건 보고 아무 말 않던 마누라가 나보곤 노인스럽다 한다.
우리 아파트는 무거동에서 점점 귀해져가는 저층 아파트라 1층에서 끝 층까지 계단을 밟고 다녀야 하는데 우리 위층 사람들도 오르내리며 마누라처럼 "참 노인스럽다!" 말할지 모른다.


그래도 나는 좋다. 좋기만 하다.
좋아하는 아우(화백)의 글이니까 더욱 좋다.
밤엔 그걸 더욱 느낀다.
계단 불 켜는 거조차 귀찮아 그냥 오르내리는 나는 대충 다 올라 왔거니 3층의 열쇠구멍에다 키를 꽂고 비틀어댄 게 한 두 번이 아니었고, 또 생각 없이 올라가 5층 구멍에 키를 들이밀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제 캄캄한 밤에도 훤히 보이는 화선지에 씐 글씨 '立春大吉'이 눈에 확 들어오기 때문이다.
마침 어젯밤, 이 화백과 한잔하고 비틀대며 계단을 하염없이 오르다가 내 집 앞 그 글씨에 어머니 젖가슴인 양 푸근히 눈에 안기더라는 거지!


4층이란 게 참 묘하다.
3층까지는 굳이 계단을 돌 때마다 층을 셀 필요가 없다. 사람의 기본 인지능력이 그걸 가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5층, 또는 그 위라면 한 층 한 층 세지 않고는 실수하기 딱 좋다.
그런데 4층은 세자니 그렇고, 안 세자니 또 그렇고... 묘한 층이 그 층이다.
이제 그 어줍잖은 고민마저 하지 않아도 된다.


올해 입춘 이후 확실히 내 눈이 밝아졌다.
아니, 해방되었다. 이보다 경사스런 일이 또 있을까?
立春大吉, 建陽多慶이로다.

 

rz_IMG_7417.jpg

(2008. 2. 22)

 

Who's 정소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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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 정소슬
메이커 : 1957년식 울산 産
성능/직업 : 비정규직
취미 : 긁적이기, 똥폼으로 사진 찍기
잡기 : 음치, 몸치, 길치... 등 중증 치과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