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고래와 문학』통권 4호

by 정소슬 posted Jun 11,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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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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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몸통을 파, 그 속에다 집을 짓고
번쩍번쩍한 가구들 다투어 들여놓고
샹들리에 늘어뜨린 대리석 식탁에 앉은 그들은
파낸 살점으로 날마다 산해진미의 잔치를 벌인다
그렇게 날마다 잔치가 벌어지건만
그들 뱃가죽과 함께 나날 늘어나는 괴이한 식성이
시중 고리사채 못잖아 감당할 길이 막막해진 그들은
금세 또 집을 갈아치우고야 마는데
그래서 고래 등을 빼닮은 아파트값이야 당연히
내리막길을 알 턱이 없는데

생태도시를 슬로건으로 내건 어느 도시에선
아파트 벽면마다 고래를 그려 넣었다
파도가 살아 꿈틀대는 바다 위를 유영하는
고래의 모습이 너무 실감 난다 너무 실감이 나서
그 앞을 지나가는 이마다 군침이 마르지 않는다
아파트 벽면을 주르르 흘러내리는 군침, 군침들……
그 군침 앞에다 잽싸게 진을 친 포장마차,
고래의 살점이 노릇노릇 익어 가는 불판 앞에서
젓가락을 휘적이며 뜬금없는 안부를 묻는다

 

―별고 없으시냐고,
―이번에 부친 용돈은 받으셨느냐고,
―차 바꾸느라 좌식화장실은 올해도 힘들겠다고,

 

지금 바다에선
껍질만 남은 빈 통의 고래들이 난파선이 되어
둥둥 떠다니고 있다
파도만이
그 빈집을 노숙자처럼 드나들고

 

- 『고래와 문학』통권 4호


*. 내용 일부와 시제를 '염낭거미'로 바꿔 시집 『사타구니가 가렵다(2014년, 푸른고래)』에 실렸음을 밝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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