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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문익환] 잠꼬대 아닌 잠꼬대 外

by 정소슬 posted Apr 10, 2010

[문익환] 잠꼬대 아닌 잠꼬대 外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풀어버리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살 스무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
한마음
그래 그 한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 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 1989. 1. 1
  *. 1988년 한겨레신문에 발표했다는 말도 있으나 근거를 찾을 수 없고,
     정경모 회고록(http://blog.ohmynews.com/leerberg/161088)에 따르면 1989년 첫날 지인들 앞에서 발표했다는 말이 맞는 거 같음. 아무튼 이 시는 훗날 시비(詩碑)로 만들어져 그의 모교이자 그가 오래간 몸담았던 한신대학교에 세워졌다.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나는 어제 저녁 정말 무서운 사람을 만났읍니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서 이야기를 듣던 에비 장군보다도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을사년 흉년 때 어머니의 외할머니를 물어간 백두산 호랑이보다도 무서운 사람이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남자가 아니었읍니다 눈물 많은 여자였읍니다 어린애가 둘이나 딸린 젊은 여자였읍니다 남편은 유리조박에 다리가 찢겨 기부스라는 걸 한 채 병원에서 까막소라는 데 끌려가 있답니다
날마다 공장이라는 데 나가 일을 해야 하는 몸이라서 아이 하나는 친정에 보냈고 하나는 시댁에 맡겨 놓았답니다 이 여인은 돌아갈 집마저 박살나 버린 셈입니다 밤이면 돌아가서 썰렁한 방에서 쿨쩍쿨쩍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잠드는 곳을 집이라고 할 수야 없지요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그 여자는 별로 악을 쓰지도 않고 이 말을 했읍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호소하는 투도 아니었읍니다 차라리 껌껌한 동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같았읍니다 약간 몸서리가 쳐지는 소리였읍니다
그 여자는 오늘도 내일도 공장에 가서 백안시당하면서 일을 해야 합니다 시댁에 맡겨 둔 두살박이 생각을 해서도 안됩니다 친정에 갖다 둔 다섯살짜리 장난꾸러기 생각을 해서도 안됩니다
기부스가 얼어들어오면 얼마나 추울까
혼자선 변소 출입도 못할 텐데
이런 생각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는 눈 깜빡할 사이에 손이 짤려나갈지도 모르니까요
이렇게 그 여자는 반 발자욱도 뒤로 물러설 수가 없읍니다 아니 반의 번의 반 발자욱도 뒤로 물러설 자리도 틈도 세상은 그 여자에게 주지 않습니다
반의 반의 반의 반 발자욱이라도 물러서는 순간 그 여자의 앞에 맞서 있는 열 키도 넘는 절벽이 무너지겠기 때문입니다 그리되면 순이도 진이도 애기 아빠도 무너지는 절벽에 묻히고 맙니다
그 절벽이 가슴에 섬찟 와 닿는 칼날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읍니까 칼 끝이 가슴을 파고 들어도 한 걸음이나마 앞으로 내디딜 수 있을 테니까요 앞으로 꼬꾸라지며 피를 쏟고 죽을 수라도 있을 테니까요
그 절벽이 한 백리쯤 뻗어 있는 가시밭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읍니까 온 몸이 찢겨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여나문 자 쯤이야 헤치고 나가다가 쓰러질 수라도 있을 테니까요
그 절벽이 불길이라면 얼마나 신나겠읍니까 그 불길에 몸을 던져 순이를 부르며 진이를 부르며 훨훨 타오를 수라도 있을 테니까요
그 여자는 반 발자욱도 내디딜 자리가 없읍니다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읍니다 다만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다고 했을 뿐입니다


-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 실천문학사, 1884

 

 

<시인의 약력>
moon_ik_hwan.jpg   문익환 (文益煥 1918∼1994)
  시인, 목사, 재야운동가. 만주 간도(間島) 출생.
  1947년 한국신학대학(지금의 한신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수학하고 귀국,
  1955∼1970년 한신대학 교수를 지냈고,
  1968∼1976년 신구교공동성서번역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76년 유신통치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을 주도하여 22개월 동안 투옥되었다.
  1984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의장이 되면서 재야운동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993년까지 5·3인천항쟁,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총 6회에 걸쳐 투옥되었다.
  1989년 3월에는 통일의 길을 연다는 기치를 내걸고 위 시의 내용처럼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의 2차례 회담 끝에 통일 3단계방안 원칙에 합의했다.
  1993년에는 통일맞이 7,000만 겨레모임 운동을 제창하는 등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전념하다가,
  1994년 1월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1992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저서에 《통일은 어떻게 가능한가》(1984), 《가슴으로 만난 평양》(1990), 《걸어서라도 갈테야》(1990)가 있고, 시집으로 《새삼스런 하루》(1974)와 《난 뒤로 물러설 자리가 없어요》(1984)와 그 밖에 산문집, 옥중서한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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