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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임종국] 비(碑) 外

by 정소슬 posted Apr 12, 2010

[임종국] 비(碑) 外

 


처음에는 그는 고읍다만
화정(花精)이었다. 아니,
아무도 들은 적 없는
향긋한 소리의 망울이었다.


오늘―――
나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다만
모습이라고 생각할 따름…….
         ※
(그것은 필연의 풍경이었다.)


무너진 성벽 아래
영원히 울리지는 않을
종(鍾)이 구을며 있는
고개마루―――.
사과나무며 무화수(無花樹) 잎이
시든 하늘을
사나운 짐승의 포효에
눈보라 휩쓰는
아우성
소리.


그 날
꽃의 가슴에랑은
낯설은 문자가 낙인되었다.
몽롱한 일월(日月) 속에서
화석(化石)한 문자가 자라고
굼실거리는 안개가 피고
그리하여 꽃은 어느덧
스스로의 가슴을 찢는
애타는 버릇을 갖고 말았다.
그리움에 사랑에 젖은,
피보다 짙은, 아아


또 하나의 풍경을 위한 그 버릇을…….
        ※
오늘
세월에 낡어가는 문자가 있다.
그 위를 고읍다던 귀열(龜裂)이 자리를 한다.


아무도 들은 적이 없는
향긋한 소리의 꽃이 망울인 모습―――


망울 속에서는 언젠가
마조 우러른 기억과 같은
그런 모양의 비(碑)가
크며 있었다.


- 文學藝術, 1956. 11

 

 


바람

 


잎을 떨치는
저것이 바람인가


전선을 울리는
저것이 바람인가


모습을 잃어
소리로만 사는 것인가


바람이여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바람이고 싶은
나는 무엇인가

바람이어야 하는
나는 또 무엇인가

모습을 벗고
소리마저 버리면
허(虛)는 마냥 실(實)인 것이니


바람이여
가서 오지 않은들
또 어떤가


- 1988. 11 (유작)

 

 


허(虛)

 


티끌
세상이 싫어
산속에 숨었더니
요란한 까막까치
무슨 일로 와서 짖나


두어라
청하지 않은 손이니
탓해 무엇하리요


구름이 가면 가고
바람이 불면 가고


눈비 맞어 얼은 남기
소리쳐 울면 울고


나로서
되는 일 아니니
마음 두어 무엇 하리요


흘러간 세월이 크니
오는 세월 또 클런가


걸어온 땅이 넓으니
바라고 갈
하늘 또 넓네


큰 세월
넓은 누리에서
바람처럼 잊으리로다


- 1988. 12 (유작)

 

위 두 '유작'에 대한 정운현 선생의 작품메모를 첨해본다.
[작품 메모] http://blog.ohmynews.com/jeongwh59/149409


두 작품은 각각 1988년 11월, 12월에 씌여졌다.
선생은 생전에 죽어서는 '바람'이 되고자 했다.
실지로 아내에게 "바람이 되고 싶다. 화장해 달라"고 유언하기도 했다.
타계하기 1년 전에 남긴 이 시는 쓸쓸한 그의 심경을 대변한 것으로,
서로를 비추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즉 '바람'속에는 '허'가 있고,
또 '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바람'은 그 자신이 바람이 되고싶은열망을 가장 허무적이고도 간절한 톤으로 그려내고 있다.
반면 '허'는 이미 세상의 욕심을 벗어버린, 즉 관조자의 입장에서 쓴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의 약력>
im_jong_gook.jpg   임종국 (林鍾國 1929∼1989)
  시인·문학평론가·재야사학자. 경상남도 창녕(昌寧) 출생.
  1956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문학예술》에 시 <비(碑)>를 발표함으로써 등단했다.
  1965년 한일회담의 반민족적 행위에 대한 인식을 계기로 본격적인 친일연구에 몰두하여 1966년 《친일문학론》을 저술하였다. 1970년대 이후부터 그의 연구영역은 정치·경제·사회·교육·종교·군사·예술 등 사회 전역에 걸친 <친일문제>로 확산되었고, 철저한 자료조사를 통한 실증적 고찰에 힘을 기울였다. 1983년 《일제침략과 친일파》, 1984년 《밤의 일제침략사》, 1985년 《일제하의 사상탄압》, 1986년 《친일문학 작품선집》, 1987년 《친일논설집》, 1988년 《일본군의 조선침략사》를 차례로 발간하였다. 제6회 심산상(心山賞)이 수여되었다.
  1989년 타계한 그의 빈소에서 그의 뜻을 기리고 유업을 받들기 위해 연구소(반민족문제연구소=>민족문제연구소) 설립이 결의되었다.

 

Who's 정소슬

profile

브랜드 : 정소슬
메이커 : 1957년식 울산 産
성능/직업 : 비정규직
취미 : 긁적이기, 똥폼으로 사진 찍기
잡기 : 음치, 몸치, 길치... 등 중증 치과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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