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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슬의 詩내기

[고은] 대동강 앞에서

by 정소슬 posted Apr 11, 2010

대동강 앞에서 / 고은

 


무엇하러 여기 왔는가.
잠 못 이룬 밤 지새우고
아침 대동강 강물은
어제였고
오늘이고
또 내일의 푸른 물결이리라.


때가 이렇게 오고 있다.


변화의 때가 그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는 길로 오고 있다.

변화야말로 진리이다.

무엇하러 여기 강물 앞에 와 있는가.


울음같이 떨리는 몸 하나로 서서
저 건너 동평양 문수릿벌을 바라본다.


그래야 한다.


갈라진 두 민족이
하나의 민족이 되면
뼛 속까지 하나의 삶이 되면
나는 더이상 민족을 노래하지 않으리라.


더이상 민족을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그런 것 깡그리 잊어버리고 아득히 거처를 떠돌리라.


그때까지는
그때까지는
나 흉흉한 거지가 되어도 뭣이 되어서도
어쩔 수 없이 민족의 기호이다.


그때까지는
시퍼렇게 살아날 민족의 엄연한 씨앗이리라.


오늘 아침 평양 대동강가에 있다.


옛 시인 강물을 이별의 눈물로 노래했건만
오늘 나는 강 건너 바라보며
두고 온 한강의 날들을 오롯이 생각한다.


서해 난바다 거기
전혀 다른 하나의 바닷물이 되는
두 강물의 힘찬 만남을 생각한다.


해가 솟아오른다.


찢어진 두 동강 땅의 밤 헤치고
신 새벽 어둠 뚫고
동트는 아픔이었다.


이윽고 저 건너 불끈 솟아오른
가멸찬 부챗살 햇살 찬란하게 퍼져간다.


무엇하러 여기 왔는가
지난 세월
우리는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왔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념이었고
서로 다른 노래 부르며
나뉘어졌고 싸웠다
그 시절 증오속에서 500만의 사람들이 죽어야 했다
그 시절 강산의 모든 곳 초토였고
여기저기 도시들은 폐허가 되어
한밤중 귀뚜라미 소리가 천지하고 있었다


싸우던 전선이 그대로 피범벅 휴전선이었다
총구멍 맞댄 철책은
서로 적과 적으로 담이 되고
울이 되어
그 울 안의 하루하루 길들어져 갔다
그리하여 둘이 둘인 줄도 몰랐다
절반인 줄도 몰랐다
둘은 셋으로 넷으로 더 나뉘어지는 줄도 몰라야 했다
아 장벽의 세월 술은 달디 달더라


그러나 이대로 시멘트로 굳어버릴 수 없다
이대로 멈춰
시대의 뒷전을 헤멜수 없다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였다
천년 조국
하나의 말로 말하였다
사랑을 말하고 슬픔을 말하였다
하나의 심장이었고
어리석음까지도 하나의 지혜였다
지난 세월 분단 반세기는 골짜기인 것
그 골짜기 메워
하나의 조국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다


무엇하러 여기와 있는가
아침 대동강 강물에는
어제가 흘러갔고
오늘이 흘러가고
내일이 흘러가리라
그동안 서로 다른 것 분명할진대
먼저 같은 것 찾아내는 만남이어야 한다
큰 역사 마당 한가운데
작은 다른 것들을 달래는 만남의 정성이어야 한다


얼마나 끊어진 목숨의 허망이었더나
흩어진 원혼들의 흔적이더냐


무엇하러 여기 와 있는가
우리가 이루어야 할
하나의 민족이란
지난 날의 향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지난 날의 온갖 오류
온갖 야만
온갖 치욕을 다 파묻고
전혀 새로운 민족의 세상을
우르르 모여 세우는 것이다
그리하여 통일은 재통일이 아닌 것
새로운 통일인 것
통일은 이전이 아니라
이후의 눈시린 창조이지 않으면 안된다


무엇하러 여기 와 있는가
무엇하러 여기 왔다 돌아가는가
민족에게는 기필코 내일이 있다
아침 대동강 앞에 서서 나와
내 자손대대의 내일을 바라본다
아 이 만남이야말로
이 만남을 위해 여기까지 온
우리 현대사 백년 최고의 얼굴 아니냐
이제 돌아간다
한 송이 꽃 들고 돌아간다


- 2000년 남북정상회담 합의문이 발표된 6월 14일 아침, 숙소인 주암산초대소에서 쓴 시로 이날 밤 만찬석상에서 시인께서 직접 낭독한 시라고 합니다.

 

<시인의 약력>

go_eun.jpg · 1933년 전북 군산 출생. 본명은 은태, 법명은 일초. 11년간 불교 승려 생활함.

 · 1958년 <현대문학>에 시 [봄밤의 말씀] 등이 추천되어 문단 데뷔

 · 미국 하버드대학 하버드옌칭 연구 교수, 버클리대 객원교수 역임

 ·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서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에 전력하기도 함.

 ·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등 수상

 · 시집 <피안감성>, <새벽길>, <조국의 별>, <네 눈동자>, <만인보>, <아침이슬>, <해금강>, <내일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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